[주성철의 사물함] 한국과 일본의 리어왕, 이순재와 나카다이 타츠야, 두 거장 잠들다

나는 영화 속 물건에 꽂힌다. 감독, 촬영감독, 미술감독, 아니면 배우 등 대체 왜 저 물건을 카메라 앞에 두었을까 깊은 고민에 빠진다. ‘주성철의 사물함’은 내 눈에 사뿐히 지르밟힌 영화 속 물건에 대한 기록이다.

“어디선가 이 모진 비바람을 맞고 있을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아. 머리 누일 방 한 칸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구멍 뚫린 창문 아래 누더기를 걸친 채, 이 사나운 비바람을 어떻게 견디고 있느냐. 내가 그동안 너희에게 너무 무관심했구나. 부자들아, 가난한 자의 고통을 몸소 겪어 봐라. 그리고 넘쳐나는 것들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해라.”(〈리어왕〉 중에서)

 

이해해주신다면 이번 주는 주성철의 ‘사물함’이 아니라 ‘인물함’이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추모를 담기 위해서다. 바로 지난 11월 25일 별세한 배우 이순재에 대한 얘기다. 그를 생각하면 지난해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시상식에서 그는 ‘대중문화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약 10분여의 기념 무대를 펼쳤다. “늙은 배우가 필요하다고 해서 찾아온 접수 번호 1번입니다. 올해 90세, 데뷔 69년차입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고 드라마 175편, 영화 150편, 연극은 100편 미만이지만 숫자를 다 기억하진 못합니다”라고 소개하며 오디션에 도전하는 상황을 연기했다.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같이 연기하고 싶은 배우가 있느냐는 물음에는 “오늘 여기 오신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다 함께 해보고 싶죠”라면서, 가장 먼저 최민식을 언급했다. “영화 〈파묘〉 잘 봤어요. 언제 그런 작품을 같이 해봐요. 내가 산신령 역을 하든 귀신 역을 하든 같이 해보면 좋겠어요”고 말했다. 얘기가 끝나자마자 최민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순재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존경을 표했다. 또 배우 이병헌을 향해서는 “우린 액션을 해야 하는데 이 나이에 치고받을 순 없고 한국판 〈대부〉를 찍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말론 브랜도 역할을 하고, 이병헌 배우가 알 파치노 역할을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최민식(왼), 이병헌,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배우의 자질에 대해서는 “대본을 외우지 않고 어떻게 연기하나요. 대본을 완벽하게 외워야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어요. 대사에 혼을 담아야 하는데 못 외우면 혼이 담길까요. 대사 외울 자신이 없으면 배우를 관둬야 합니다. 그건 원칙입니다”이라고 강조하며, “항상 새로운 작품과 역할에 도전해야 해요. 새롭게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고민하는 게 배우죠. 그래야 새로운 역할이 창조됩니다”라며 “그동안 연기를 아주 쉽게 생각했던 배우, 이만하면 됐다는 배우 수백 명이 없어졌어요. 노력한 사람들만 남아 있는 겁니다. 연기에는 완성이 없어요. 완성을 향해서 고민하고, 노력하고, 도전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입니다”라고 했다.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끝으로 ‘아직도 연기에 도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오디션 심사위원의 질문에 “평생을 해도 모자랍니다. 언제나 똑같지 않은 역할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연기는 잘할 순 있어도 완성이 없어요. 배우, 코미디언 모두의 숙명”이라고 했다. 끝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뭐 상도 많이 못 타봤으니까, 상 탈 배우는 아니고 ‘열심히 하는 배우다’ 이렇게만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며, 서두에 언급한 〈리어왕〉 연기를 보여줬다.

 

“내가 늘그막에 모험을 했어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 〈리어왕〉을 홀로 3시간 20분을 해봤습니다. 두 차례 걸쳐서 했는데 그걸 하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사람이 최고의 위치에 있을 때 저 밑바닥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과거 봉건 군주제 밑에서는 사람들, 백성들 몇이 죽어 나가도 신경도 안 썼어요. 근데 본인이 그 바닥에 떨어졌을 때 처음 그걸 느끼는 겁니다. 딸들에게 권력과 모든 걸 다 줬어요. 그 딸들에게 쫓겨나가지고 이 광야에서 비바람을 맞으면서 보고 느낀 상황입니다. 중요한 대목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맨 위의 〈리어왕〉 대사로 연기를 마칠 때, 당시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현장의 거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연기를 마친 이순재는 관객석을 향해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뒤, 아마도 애드립으로 심사위원을 향해서는 “나 꼭 시켜야 돼”라고 말하며 퇴장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순재 배우는 딱 한 번 인터뷰하고, 밥도 먹자 하셔서 중국집을 간 적 있다. 식단 관리를 따로 하실 줄 알았더니, 시뻘건 짬뽕을 후루룩 드셨던 기억이 난다. 원래 영화배우로 더 성공하고 싶었고, 실제로 영화출연을 꽤 많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른바 TV로 더 익숙한 대배우가 됐다. 그런 갈증을 얘기하며, 일본 배우 나카다이 타츠야에 대해 언급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카게무샤〉(1980)와 〈리어왕〉을 원작으로 삼은 〈란〉(1985) 등 구로사와 아키라의 배우로 유명하지만, 고바야시 마사키의 〈인간의 조건〉(1959)에 출연한 나카다이 타츠야의 연기를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고미카와 준페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인간의 조건〉은 전쟁 속에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한 남자의 역정을 그린 총 6부작의 대작으로, 전체 상영 시간이 무려 10시간에 가깝다.

〈란〉의 리어왕, 나카다이 타츠야
〈란〉의 리어왕, 나카다이 타츠야

나카다이 타츠야는 일본영화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란〉의 촬영장을 방문해 완성한 다큐멘터리 〈구로사와 아키라의 초상〉(1985)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단 한 번의 테이크로 그 엄청난 분량의 시적인 대사들을 소화해내는 그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카게무샤〉와 〈란〉을 비롯해 구로사와 아키라와 5편을 함께 했지만 고바야시 마사키, 이치가와 곤, 나루세 미키오 등 당대 최고 일본 감독들과 함께하며 선명한 궤적을 남겼다. 그외 데시가하라 히로시, 오카모토 기하치, 고샤 히데오, 구마이 게이, 기노시타 게이스케, 시노다 마사히로 같은 감독들의 명단까지 더하면 정말 일본의 모든 명감독들의 영화에서 서로 다른 캐릭터로 등장했다. 그들 모두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낸 감독들이기에 일본영화계에서 동시대 어떤 배우들과 비교해도 진정 드문 경우다.

 

〈인간의 조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나카다이 타츠야
〈인간의 조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나카다이 타츠야

나카다이 타츠야는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찾은 바 있다. 당시 그와 인터뷰하게 된 것도 크나큰 영광이었다. 이순재 배우가 극찬한 〈인간의 조건〉 당시 자료를 가져와 한참 얘기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는 이듬해인 2011년 ‘3K, 3인의 일본 거장전’, 2012년 배우 인생 60주년 기념 ‘나카다이 다쓰야 특별전’을 통해 무려 3년 연속 한국을 찾았다. 이순재 배우를 인터뷰하며 나카다이 타츠야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2011년 강풀 원작, 추창민 감독 〈그대를 사랑합니다〉 개봉 때였으니, 이후 그가 방한할 때마다 당시 영상자료원 모은영 프로그래머님과 의기투합하여 ‘이순재와 나카다이 타츠야의 특별 대담’을 추진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했던 건 정말 천추의 한이다. 그렇게 11월 한 달 동안,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대배우가 세상을 떴다.

 

이순재 (1935년 10월 10일~2025년 11월 25일)

나카다이 타츠야 (1932년 12월 13일~2025년 11월 11일)

***** 영화 속 물건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주성철의 사물함’을 시작으로 떡상을 기대하는 배우 사용 설명서 ‘김지연의 보석함’,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음악 감상실 ‘추아영의 오르골’, 서브컬처 잡상인의 구매일지 ‘성찬얼의 만화책’까지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저마다의 취향과 시선으로 격주 연재를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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