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얼의 만화책] 가깝고도 먼 대가족의 풍경 「그와 달」

나는 서브컬처라면 환장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웹툰,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등 참신한 이야기나 소재, 캐릭터를 다루는 건 일단 살펴본다. 만화책으로 '덕'의 세계를 연 나는 e북으로 만화책을 보고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읽는 ‘애어른’이 됐다. 그치만 혼자 보면 재미가 덜하다. 같이 보면 더 재밌을 것들을 잡덕인의 시선으로 담아 [성찬얼의 만화책]을 그린다.

때로는 아주 이상하게 인연이 닿는 작품이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것이 마음에 꽤 오래 남는 경우가 있다. 필자에겐 이쿠에미 료 작가의 「그와 달」이란 만화가 그렇다.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는데, 한 번 본 순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 다시 읽고 싶다고 떠오르곤 한다. 딱 3권으로 완결된 이 만화는 장르를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다. 가족 드라마이지만, 단합이나 화합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삐딱한 부분이 있으며, 만화 전체를 장악하는 메인 스토리랄 것도 없다. 그런데 이 희한하게도 살짝 엇나간 이 모든 요소야말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와 달」이란 세 글자를 필자의 마음에 남겨두었다.

「그와 달」
「그와 달」

「그와 달」은 3대가 함께 사는 하가미 가족의 이야기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세 남매가 겪는 일상인 듯 아닌 듯한 시간들을 묘사한다. 이렇게 설명을 흐리멍덩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품이 여러 차례 회자와 시간대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꾸려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독립해 살고 있는 장남 아키가 ‘집에 귀신이 나온다’며 본가로 돌아온 상황이다. 장녀 히로노는 아라타라는 동급생에게 대시를 받고 있고, 막내 호노카는 남자친구 하야토와의 관계에서 미묘한 불안감을 느낀다. 평생을 우수한 인재로 산 아키는 얼마 전 죽은 직장 동료와의 마지막 대화가 계속 맴돈다. 세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그려지는 이야기는 캐릭터의 성격은 물론이고 가족 구성원이 서로에게 가지는 미묘한 거리감까지 짚어낸다.

「그와 달」
「그와 달」
「그와 달」
같은 저녁 자리, 다른 느낌 (「그와 달」)

작품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엮어간다. 같은 기간을 세 남매를 중점으로 그린 다음에도 비슷하게 화자를 옮겨가며 주변 인물로까지 이야기를 확장한다. 「그와 달」은 그렇게 세계를 완성한다. 3권이란 결코 길지 않은 분량에도 이 만화가 꽉 찬 것처럼 느껴지는 건 사건의 장대함이나 설정의 독특함이 아닌 이런 식으로 캐릭터가 느끼는 감정을 독자에게 긴밀하게 전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에 대해 알지 못한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정확하게 담아내기 때문이리라.

한편으론 「그와 달」의 세계가 유독 깊은 잔상을 남긴 건 대가족이란,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가족 형태에서 오는 소란스러움이 그대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티격태격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때로는 바보 같아도 성실하게 사는 노동자 아버지와 집에서 가족을 살뜰히 살피는 어머니, 어느 순간부터 서로가 다른 것을 알아버린 남매. 그렇게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한 지붕 한 식탁에서 저녁을 보내며 꼭 쓰잘머리 없는 대화까지도 주고받는, 그 몽글몽글한 풍경. 모든 가족이 그렇진 않겠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독자나 명절 때 친인척들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환경의 독자라면 이 풍경이 주는 친숙함(과 동시에 미묘한 불편함)이 금방 떠오를 것이다.

「그와 달」
「그와 달」
「그와 달」
「그와 달」
에피소드 분위기에 맞춰 컷 활용도가 좋은 「그와 달」

캐릭터의 내면 서술을 바탕으로 그려지기에, 요란 법석한 분위기와 달리 이야기가 다채롭고 깊이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아키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는 ‘죽음’이란 평등함을 마주하게 된 탄탄대로를 달려온 사람의 무력함을 날카롭게 담는다. 그러면서도 우연찮게 그 무기력함을 극복하게 되는, 인생의 소소한 기적을 지목하는 점도 생각이 많은 독자들에게 여운을 줄 것이다. 그렇다고 또 마냥 무겁지만은 않은 것이 히로노와 아라타의 이야기는 그 나이대에 맞는 잔잔한 로맨스를 들려주고, (고양이 애호가로 알려진 이쿠에미 료 작가답게) 반려묘 포세이돈의 이야기는 집사라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만큼 감동적이다.

「그와 달」
「그와 달」

이쿠에미 료 작가의 얇은 펜선과 그에 대비되는 다양한 스크린톤 활용, 그리고 이야기 스타일에 맞춘 컷 활용도 등 베테랑 작가의 역량이 느껴지는 「그와 달」은 발간된 지 오래돼 종이책으론 구하기가 어렵다. 다만 웬만한 e북 플랫폼엔 구비돼있고(네이버 시리즈에도 있다) 권수도 적어 부담 없이 구매하기 좋다. 화려하거나 장대하진 않지만 마음에 깊이 남을 만화를 찾고 있다면 「그와 달」을 꼭 챙겨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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