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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철의 사물함] 무협거장의 거장 호금전부터 오우삼, 성룡, 홍금보 모두 매혹된 종묘의 미학

나는 영화 속 물건에 꽂힌다. 감독, 촬영감독, 미술감독, 아니면 배우 등 대체 왜 저 물건을 카메라 앞에 두었을까 깊은 고민에 빠진다. ‘주성철의 사물함’은 내 눈에 사뿐히 지르밟힌 영화 속 물건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에서 촬영된 〈산중전기〉(왼)와 〈공산영우〉

이번에도 양해를 구해야겠다. 지난 연재를 ‘주성철의 인물함’으로 바꿔 이순재 배우 추모글을 썼는데, 이번 글도 ‘주성철의 건물함’으로 바꿔 ‘종묘’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종묘 주변을 두고 개발과 재건축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그를 둘러싼 법적 문제는 당연히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할 일이고, 무엇보다 종묘가 등장한 영화들을 소개하고 싶어서다. 과거 중국 본토에 가서 무협영화를 찍을 수 없었던 홍콩영화들에 대한 얘기다.

 

〈산중전기〉

종묘를 가장 좋아한 감독은 바로 홍콩 무협영화의 거장 호금전이다. 칸영화제에서 기술상을 수상한 〈협녀〉(1971)를 시작으로 〈충렬도〉(1975), 〈산중전기〉(1979), 〈공산영우〉(1979)는 압도적인 풍경의 리듬과 미학을 보여주는 호금전의 ‘풍경 4부작’이라 불린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해인사와 불국사, 그리고 종묘를 유난히 좋아해서 〈산중전기〉와 〈공산영우〉 모두에 등장한다. 두 영화는 위 세 장소뿐만 아니라 부산 태종대부터 강원도 설악산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동시에 촬영해 같은 해 개봉한 영화들이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海印寺)의 경우 ‘바다 해’와 ‘도장 인’이 결합해 ‘거친 파도가 멈춘 바다에 참된 모습이 비치는 경지’라는 이름의 뜻까지 좋아해, 귀신이 등장하여 호금전의 작품들 중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산중전기〉에 ‘해인사’라는 이름 그대로 등장시켰다.

 

〈공산영우〉

종묘는 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등장한다. 호금전은 무려 101미터인 종묘 정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수평선과 거대한 마당에 매료됐다. 영화 내내 인물들의 다채로운 동선과 율동으로 욕망의 충돌을 종횡무진 드러내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승려들이 가득한 종묘의 압도적인 수평의 공간감을 통해 클라이맥스의 혼란스러움이 일거에 해소되는 경지에 이른다. 자신의 인터뷰집에서 그는 종묘에 대해 “내가 한국에서 찾은 가장 거대한 건축물”이라 했는데, 좌우 대칭의 긴 수평선이 그가 추구한 공간의 질서에 딱 들어맞는다. 더불어 그는 서울에 대해 그런 문화유적들이 “모여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여기서 저기가 보이고, 저기서 여기가 보이는 그 오밀조밀함의 매력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오밀조밀함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2025)에서도 확인되지만 종각, 종로, 광화문, 명동, 충무로를 중심으로 딱히 크게 가리는 것 없이 남산타워를 향하는 풍경을 말할 것이다. 종묘가 보여주는 그 압도적인 수평의 질서는 남산으로 위화감 없이 시선이 이동할 때 완성되는 것 아닐까. 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공간감이라는 측면에서, 호금전은 서울에서 종묘가 가지는 지리적, 미학적 매혹을 가장 진심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감독일 것이다.

〈소림문〉

종묘는 〈영웅본색〉(1986), 〈첩혈쌍웅〉(1989)으로 유명한 오우삼 감독이 경력 초창기에 만든 무협영화 〈소림문〉(1976)에도 등장한다. 〈용호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했던 〈소림문〉은 소림사 출신으로 청나라에 투신해 관직을 얻은 변절자 석소봉(전준)을 제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당시 현란한 발차기로 이름이 높았던 담도량이 주인공이고, 성룡은 소봉에게 형을 잃고 복수를 꿈꿔온 동생으로 출연했다. 당시 쌍거풀 수술하기 전의 성룡이 가장 비중있게 출연한 작품이기도 하고, 홍금보도 소봉의 졸개로 등장했으며, 그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배우 원표도 화살에 맞아죽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종묘는 북경 자금성의 대체재라 할 수 있다. 앞서 얘기한 종묘의 압도적인 공간감이 최고 권력자의 거처로 등장한 것. 여기서 홍금보는 위험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강호의 고수들을 모두 불러 모은다.

〈사학팔보〉

당시 무수히 많은 한홍합작 영화에 출연한 성룡은 역시 종묘가 등장하는 〈사학팔보〉(1978)의 주인공도 맡았다. 과거 〈사학비권〉으로 국내 개봉하고 TV에서는 〈소림사의 비권〉으로 소개된 〈사학팔보〉는, 이른바 ‘성룡의 무술영화’들 중 무려 1978년 같은 해 개봉한 〈취권〉이나 〈사형도수〉를 제외하면 가장 재미난 영화 중 하나였다. 최종 빌런으로 등장한 배우 금강과 성룡의 마지막 대결이 볼만했던 〈사학팔보〉 도입부에서, 종묘는 중국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모여 회의하고 합을 겨루는 장소로 등장한다. 역시 종묘라는 공간이 가져다주는 위엄을 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도입부
〈광해, 왕이 된 남자〉 도입부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문화유산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과거의 얘기다. 우리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도입부에는 눈 덮인 종묘가 등장하는데, 이제 종묘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 없기에 사진작가의 작품을 구입해 사용한 것이다. 문화유산 관리 차원에서, 앞서 언급한 홍콩영화들처럼 종묘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어쨌거나 그런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종묘가 가지는 공간감의 가치가 종묘 그 자체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조화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소림문〉에서 홍금보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입구로부터 종묘까지 달려오는 병사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바깥의 현대식 건물들도 보이기에 적당히 입구부터 촬영했는데, 너른 마당부터 수평의 담벼락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소림문〉 종묘 질주 장면

사극이라 당연히 정면의 현대 풍경을 담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앞에 엄청난 높이의 고층 건물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압도적인 수평의 미학은 물거품이 된다. 호금전이나 오우삼 감독이 종묘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을 담지 않은 건, 남산타워를 비롯한 일부 현대식 건물을 CG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지, 만약 남산만 보인다면 당연히 반대편도 보여줬을 것이다. 그 갈증을 앞서 얘기한 〈소림문〉의 병사 질주 장면에서 느낄 수 있다. 호금전이 층수로 보자면 고작 1층에 불과한 종묘를 두고 ‘엄청나게 거대한 건축물’이라고 얘기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거기‘를’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바라보는 것까지 한데 묶어서 ‘뷰’가 완성되는 것이다.

 

영화 속 물건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주성철의 사물함’을 시작으로 떡상을 기대하는 배우 사용 설명서 ‘김지연의 보석함’,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음악 감상실 ‘추아영의 오르골’, 서브컬처 잡상인의 구매일지 ‘성찬얼의 만화책’까지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저마다의 취향과 시선으로 격주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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