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는 홍콩섬의 빅토리아 피크다. 피크트램을 타고 올라가면, 홍콩섬의 빌딩 숲을 앞에 두고 저 멀리 구룡반도가 보이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홍콩 다녀온 사람들의 야경 풍경 대부분이 여기다. 관광객이 계속 늘어나며 더 높은 곳의 전망을 위해 반달 모양의 전망대까지 만들었는데, 여기가 처음 등장한 영화는 바로 장국영 주연 〈성월동화〉(1999)다. 〈금지옥엽〉(1994)에서는 빅토리아 피크를 대표하는 (지금은 없어진) 카페 ‘카페 데코’에서 장국영이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장면도 있었기에, 장국영을 추억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양조위의 부인 유가령이 이곳에서 이어지는 ‘뤼가드 로드’에서 거의 매일 조깅하고 SNS에 인증샷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쩌면 이른 시간 이곳을 방문해 산책하다 유가령을 마주칠지도 모를 일이다.


빅토리아 피크 타워에는 세계적인 스타들과 유명인들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한 ‘마담투소 박물관’이 있다. 인물들의 얼굴과 체형을 그대로 본떠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에 문제적 사물(?)인 장국영 밀랍인형이 있다. 올해 장국영 기일 23주기를 맞아 이곳을 방문해 추모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앞서 한국에서도 3월 25일 〈연지구〉(1987)가 최초 개봉하고 4월 1일에는 〈패왕별희〉(1993)가 재개봉하며 그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바야흐로 4월은 장국영의 계절이다. 그런데 장국영 밀랍인형은 볼 때마다 슬프다. 바로 〈패왕별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속 장국영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국영의 개인사를 떠올릴 때, 많은 팬들이 가장 겹친다고 얘기하는 영화가 바로 〈패왕별희〉다.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예술가로서의 충만한 자의식이 〈패왕별희〉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비정전〉(1990)에서도 태어날 때부터 버려졌던 것처럼 〈패왕별희〉의 두지(장국영)도 어려서 버려진다. 심지어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물론 겉으로는 경극학교에 자신을 맡기고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똑똑히 쳐다본다. 〈패왕별희〉의 어린 두지는 태어날 때부터 손가락이 하나 더 많았다. “홍등가에서 다 큰 사내아이를 데리고 있을 수 없다”며 맡아주길 부탁하는 엄마(장문려)에게, 경극학교의 사부는 “당신 자식은 ‘육손’이라 절대 배우가 될 수 없어요. 얼굴은 반반하게 생겼지만, 관객들이 저 손을 보면 기겁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하자마자, 엄마는 새끼손가락에서 하나 더 삐져나온 그 새끼의 새끼손가락을 단숨에 칼로 잘라버린다. 그렇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눈 오는 거리로 나가 다시 홍등가로 돌아간다.

이후 두지는 경극학교에서 시투(장풍의)를 만나 세상에 둘도 없는 아우와 형으로서 주연급 배우로 성장하는데, 두지는 무대 위의 연인인 시투를 향해 현실에서도 남모를 연정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시투는 주샨(공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로 인해 두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급기야 시투는 주샨과 즉석 약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그걸 알게 된 두지는 화가 나 “죽을 때까지 함께 하라는 스승님 얘기를 잊었어? 평생을 함께 해야 해. 일분일초가 모자라도 한 평생이 아니야!”라고 따진다. 그러자 시투는 두지에게 “경극과 현실을 구분해!”라고 충고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경극 배우들은 일본군을 위한 무대를 올리게 된다. 배우들이 거의 희롱당하는 수준에 이르자, 혈기왕성한 시투와 일본군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런 시투를 빼낼 수 있는 방법은, 굴욕적이지만 두지가 일본군 고위간부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시투는 풀려나오게 되고 두지는 그를 맞이하러 간다. ‘미안해’ 혹은 ‘고마워’라는 얘기를 들으리라 기대했건만, 시투는 ‘대 경극배우가 자존심도 없이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했다’며 얼굴에 침을 뱉는다.

마담투소 박물관의 장국영은 그처럼 얼굴에 침을 맞고 슬프게 홀로 남겨진 〈패왕별희〉의 두지를 밀랍인형으로 만든 것이다. 〈패왕별희〉에서 그가 딱 한 번 차려입은 외출복인데, 바로 그 차림을 하고서 사랑하는 시투로부터 침을 맞았다. 〈아비정전〉에서 친엄마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모습 만큼이나 장국영의 여러 영화 속 순간 중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중 하나다. 기념할 만한 순간이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고, 하여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더 슬픈 건, 2000년에 개관하고 장국영이 2003년 세상을 떠나면서, 따로 스크린을 설치해 추모 영상을 상영하는 등 장국영의 공간이 상당히 넓었는데, 이후 한국의 수지나 정해인 등 새로운 스타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그 공간이 갈수록 좁아졌다. 어쩌면 그게 더 가슴 아픈 일일지도 모른다.

최근 국내 개봉한 〈연지구〉와 〈패왕별희〉를 보면서 떠오르는 소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홍콩을 대표하는 문화 매거진 〈호외〉(號外)의 30주년 기념호다. 1976년 창간된 〈호외〉는 1980~90년대 장국영 등 홍콩 스타들의 감각적인 표지 사진으로 유명한데, 30주년을 기념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경극배우 분장을 한 장국영 표지가 역대 최고의 표지로 꼽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장국영이 빛을 받으며 돌아 앉아있는 내지 사진 역시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다. 그렇게 30주년 기념호 박스세트가 만들어졌다. ‘경극배우 분장’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얼핏 이 표지가 〈패왕별희〉 개봉 즈음의 표지처럼 생각되지만 놀랍게도 캐스팅도 되기 전에 촬영한 표지라는 점이다. 〈연지구〉를 비롯해 〈패왕별희〉에서도 이 모습으로 등장한 적 없다.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은 경극 〈패왕별희〉의 우희, 〈귀비취주〉의 양귀비, 〈목단정〉의 두여랑, 그렇게 세 사람을 연기했는데 표지 속 분장은 바로 〈백사전〉의 백소정인 것. 실제로 그가 가장 좋아한 경극이 바로 〈백사전〉이었고 언젠가 꼭 영화로도 만들고 싶어 했다. 서극 감독 〈청사〉(1993)에서 왕조현이 바로 이 천년 묵은 백사 백소정을 연기한 바 있다.


〈호외〉 30주년 기념호 표지는 〈패왕별희〉 캐스팅이 결정되기 한참 전, 두지 역을 탐냈던 장국영이 그 역할에 자신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 찍은 표지다. 첸 카이거 감독은 원래 자신이 참여하기도 한 영화 〈마지막 황제〉(1988)에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연기한 배우 존 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캐스팅이 확정되지 못하던 그 틈을, 장국영이 기어이 비집고 들어가 결국 그 역할을 따낸 것이다. 그렇게 비어 있던 캐스팅을 막차로 겨우 채운 것처럼 보일 테지만, 〈패왕별희〉를 다시 보시라. 오프닝 크레딧에 장국영의 이름이 공리나 장풍의보다 먼저 뜬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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