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철의 사물함] 안성기가 나다, 내가 안성기다

나는 영화 속 물건에 꽂힌다. 감독, 촬영감독, 미술감독, 아니면 배우 등 대체 왜 저 물건을 카메라 앞에 두었을까 깊은 고민에 빠진다. ‘주성철의 사물함’은 내 눈에 사뿐히 지르밟힌 영화 속 물건에 대한 기록이다.

〈기쁜 우리 젊은 날〉 현장에서 구본창 작가가 촬영한 것으로, 영정 사진으로 사용됐다.
〈기쁜 우리 젊은 날〉 현장에서 구본창 작가가 촬영한 것으로, 영정 사진으로 사용됐다.

안성기 배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기에, 또 한 번 양해를 구하고 이번 연재도 ‘주성철의 인물함’이다. ‘국민배우’라는 표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그가, 오랜 시간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맥심 커피 38년 광고 모델이라는 대기록이다. 1983년부터 2021년까지 “커피, 이제는 ‘향’입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무려 38년 동안 한 제품의 모델로 활동한 것. “그래! 이 맛이야”라는 카피와 함께 1975년부터 2003년까지 역시 놀랍게도 27년 동안 조미료 다시다 광고 모델로 활약한 김혜자 배우의 기록을 넘어섰다. 뒤를 이을 것으로 보였던 이나영, 원빈 배우 부부는 각각 맥심 모카골드 24년, 맥심 티오피 16년 광고 모델로 계약이 종료됐다. 2011년부터 동서 카누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공유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무려 38년 모델, 맥심 커피 광고
무려 38년 모델, 맥심 커피 광고

영화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보면, 더 놀랍다. ‘국민배우’라는 표현답게 안성기는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창작자의 시선과 주제를 자기 얼굴과 육체를 통해 드러내는 존재로서의 배우를 ‘페르소나’라고 부른다면, 안성기는 그 누구의 페르소나도 아닌 ‘한국인의 페르소나’였다고나 할까. 일단 그는 〈영원한 제국〉(1995)의 정조와 〈신기전〉(2008)의 세종대왕, 그리고 〈피아노 치는 대통령〉(2002)과 〈한반도〉(2006)에서 대통령을 연기하며 왕과 대통령을 동시에 연기했다. 이어 이두용 감독 〈내시〉(1986)에서는 내시를 연기했고 〈만다라〉(1981)에서는 스님, 〈퇴마록〉(1998)과 〈사자〉(2019)에서는 신부를 연기했으니 신분과 종교를 초월해 왕과 내시, 스님과 신부를 모두 연기한 세계 유일의 배우일 것이다.

 

〈내시〉(왼)와 〈영원한 제국〉

더불어 그는 영화 캐릭터로서 몸담지 않은 세계나 연기하지 않은 직업이 없다. 먼저 ‘군인’도 여러 부류를 연기했다. 〈하얀전쟁〉(1992)과 〈실미도〉(2003)에서는 각각 병장과 준위로서의 정규군, 〈화려한 휴가〉(2007)에서는 시민군, 〈남부군〉(1990)에서는 빨치산, 〈묵공〉(2006)과 〈노량: 죽음의 바다〉(2023)에서는 장군, 〈무사〉(2001)에서는 사신단을 이끄는 리더이자 용병, 〈형사: 듀얼리스트〉(2005)에서는 포졸이었다. 법정에서도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에서는 변호사, 〈진실게임〉(2000)에서는 검사, 〈부러진 화살〉(2012)에서는 피고인이자 교수였다. 그 외 〈안개마을〉(1983)의 거지, 〈킬리만자로〉(2000)의 건달, 〈마이 뉴 파트너〉(2008)의 경찰,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의 중국집 배달부, 〈라디오스타〉(2006)의 매니저,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의 도사, 〈타워〉(2012)의 소방서장, 〈페이스 메이커〉(2012)의 마라톤 코치도 있고 제목 그대로 〈개그맨〉(1989)에서는 개그맨, 〈헤어드레서〉(1995)에서는 헤어드레서, 〈잠자는 남자〉(1996)에서는 잠자는 남자였다. 김기영 감독 〈하녀〉(1960)의 아동배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직업군을 넘나들며, 연기하지 않은 캐릭터가 없다.

 

〈만다라〉(왼)와 〈사자〉

그럴 정도니, 해외영화제에서 만난 한 외국인 평론가와의 만남이 문득 떠오른다. 박찬욱 감독 〈올드보이〉(2003)를 통해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주변의 여러 영화인들로부터 꼭 봐야 할 한국영화들을 추천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20편 가까운 현대 한국영화들을 보게 됐는데, 그러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분명 감독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고 스타일까지 다 다른 영화들인데, 유독 한 명의 배우가 계속 나왔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안성기였다. 그러면서 농담 섞어 이렇게 얘기했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무조건 안성기를 캐스팅해야 하는 법규가 있었냐’고, 이른바 ‘안성기 쿼터제’가 있었냐는 얘기였다. 이처럼 한 배우의 역사와 영화계의 역사가 고스란히 맞물리는 경우는 세계영화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별하다. 그래서 안성기는 한국인을 연기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안성기가 나다, 내가 안성기다.

 

박중훈 배우와 함께 한 〈칠수와 만수〉(왼)와 〈투캅스〉

그럼에도 안성기의 기나긴 경력을 압축할 수 있는 서로 다른 3편의 영화를 꼽으라면, (공교롭게도 박중훈 배우와 모두 함께 출연한) 이른바 사회비판적 성향의 박광수 감독 〈칠수와 만수〉(1988), ‘비공식 천만 영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코미디 영화인 강우석 감독 〈투 캅스〉(1993), 이전과 달리 무게감 있는 조연의 모습으로 출연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와 조우한 이명세 감독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다. 이들 세 영화는 한국영화의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는 영화들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회파 영화부터 정통 코미디 영화, 그리고 50대에 접어들면서는 기꺼이 후배 배우들과의 앙상블 연기를 즐기며 한국영화는 더욱 성장해나갔다. 영화 바깥에서는 한국영화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 한국영화 점유율을 지키고자 했던 ‘스크린쿼터’ 운동, 합법 다운로드를 장려하자는 취지의 ‘굿다운로더’ 캠페인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를 위해서라면 어디에나 나타났다. 그런 작품 외적인 신뢰와 성실까지 더해져 ‘국민배우 안성기’라는 말이 만들어지게 됐을 것이다.

 

〈킬리만자로〉(왼)와 〈라디오 스타〉

한국영화의 유구한 역사와 안성기의 안타까운 퇴장이 겹치는 시대 변화의 의미심장한 풍경은 바로 OTT 시대의 도래다. 여태껏 안성기는 TV드라마 출연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영화배우로서 비슷한 지향점을 공유하고 있는 박중훈과 강수연도 각각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1993)과 〈여인천하〉(2001)를 통해 그 경계를 넘나든 적 있고, 전혀 TV드라마 출연을 하지 않던 배우 송강호 역시 지난해 OTT 시리즈 〈삼식이 삼촌〉(2025)에 출연했으니, 그것은 안성기와 동시대 선후배 배우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올해 방영 예정인 KBS 드라마 〈맨발의 미쓰비시 데보네어〉를 작업한 바 있다. 배우 안성기의 유일한 TV드라마 출연작이자 사실상 배우로서의 마지막 작품이 그래도 하나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일까. 다시 그의 장수 모델 광고로 돌아와 “커피, 이제는 ‘향’입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딴따라’라 불리던 연예인들이 시대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품격’을 갖게 됐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안성기는 그 모든 것을 바꿔놓은 사람이다. 이제 영화를 넘어 드라마와 OTT에 이르기까지, 그의 새로운 향을 맡게 되지 못한 게 너무나도 안타깝다. 계속 그가 그리울 것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꼬방동네 사람들〉 현장에서 구본창 작가가 촬영한 사진
〈꼬방동네 사람들〉 현장에서 구본창 작가가 촬영한 사진

영화 속 물건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주성철의 사물함’을 시작으로 떡상을 기대하는 배우 사용 설명서 ‘김지연의 보석함’,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음악 감상실 ‘추아영의 오르골’, 서브컬처 잡상인의 구매일지 ‘성찬얼의 만화책’까지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저마다의 취향과 시선으로 격주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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