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지구〉(1987)는 한국에서 오래도록 〈인지구〉라는 제목으로 살았다. 영화를 최초로 소개한 당시 영화잡지 기자가 한자를 착각해 〈인지구〉라고 쓰고, 그걸 다른 매체들도 다 받아쓰면서 벌어진 일이다. 한때 액션스타 견자단(甄子丹)도 그런 일을 겪었다. 역시 최초로 소개한 기자가 한자를 착각해 ‘진자단’이라 쓰면서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기자가 한자 이름을 쓰기 위해 ‘옥편’을 뒤지던 시절에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인지구’의 뜻이 무엇인지 이리저리 꿰맞춰 보고, 나중에 ‘연지구’라고 정정된 뒤에도 해석하고자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제목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연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연지곤지’에서 온, 영화의 영어 제목인 루즈(Rouge)를 뜻하고, 연지구(胭脂扣)는 바로 그 연지를 담은 ‘연지합’을 말한다.

1934년 홍콩, 부유한 가문의 자제인 진진방(장국영)과 기생 여화(매염방)는 진방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한다. 여화는 월극 배우를 꿈꾸는 진방을 위해 극단의 스승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는 진방의 뜻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정혼자 숙현(온벽하)을 만나게 하고, 월극 배우 역할도 단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두 사람은 50년 뒤 3월 8일 11시, 저승에서의 재회를 약속하며 동반 자살을 선택한다. 이제 1987년 홍콩, 귀신이 되어 나타난 여화는 진방을 만나기 위한 구인광고를 내러 신문사를 찾아 원영정(만자량)을 만난다. 믿기 힘들지만 여화가 귀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여자친구이자 동료기자인 초초(주보의)와 함께 진방과의 만남을 돕는다. 하지만 과거의 기사를 들춰보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매염방은 〈연지구〉를 통해 1987년 대만 금마장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1989년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가수로서는 최고였지만, 그전까지 주로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던 매염방이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또한 당시 홍콩영화계는 전통의 강자 골든하베스트와 새로운 강자 시네마시티가 제작사로서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는데, 시네마시티의 〈영웅본색〉(1986)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장국영이 그런 구도를 깨고 골든하베스트 제작 〈연지구〉에 출연할 수 있게끔 애쓴 것도 바로 매염방이었다. 당시 홍콩 배우들은 일종의 ‘전속’ 개념이 있어서 타 영화사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즉, 매염방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연지구〉는 없었다.

매염방과 장국영은 오프닝부터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연지구〉에서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하는 세 곡 혹은 월극 공연은 커밍아웃한 게이 감독인 관금붕과, 평소 젠더리스한 공연으로 신선한 충격을 줬던 장국영이나 매염방의 예술가적 기질과 적극적으로 부합한다. 주로 여성이 화장할 때 쓰는 ‘연지’ 혹은 ‘루즈’를 제목으로 내세운 것과 달리 〈연지구〉는 젠더를 초월한 작품인 것. 〈연지구〉가 예나 지금이나 모던한 영화로 다가오는 데는 그런 면모가 큰 몫을 한다. 돌이켜보니, 초초가 신문사에 원영정을 홀로 남겨 두고 갔던 취재 현장이 바로 ‘미스 홍콩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내막을 폭로한다’는 클럽이었다. ‘연지’ 혹은 ‘루즈’, 그리고 ‘미스 홍콩’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당대의 고정화된 ‘여성성’에 대한 전복이랄까, 그 또한 의미심장하게 엮이는 에피소드다.

먼저 첫 장면에서 여화는 남장을 하고 ‘객도추한’(客途秋恨)을 부르는데, 뒤늦게 술자리에 나타난 진방은 바로 그 모습에 매혹된다. “근심은 달을 차오르게 한다네”라고 노래하는 ‘객도추한’은 객지를 떠도는 나그네가 고향과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가을날의 쓸쓸한 회한을 담아 부르는 노래다. 홍콩을 비롯한 광동 지역에서 오래도록 전해지는 월극 명곡 작품 속 두 인물의 처지와도 연결되는데 ‘계절은 때가 되면 돌아오는데, 정작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다’며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기도 한다.


객도추한의 정서는 고향을 떠난 홍콩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하는데 허안화 감독, 장만옥 주연 〈객도추한〉(1990)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홍콩 역대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을 갈아치운 〈파·지옥〉(破·地獄, The Last Dance, 2024)에도 주제곡으로 쓰였다. 〈연지구〉에서는 매염방의 노래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객도추한’을 불렀지만, 장국영도 이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연지구〉가 박스오피스에서 엄청나게 흥행한 이후, 1988년 자신의 콘서트에서 〈연지구〉 오프닝에서 입었던 의상 그대로 무대에 올라 ‘객도추한’을 불렀다. 유튜브에서 ‘客途秋恨 張國榮’으로 검색하면 그 멋진 무대를 볼 수 있다.

두 번째 무대는, 진진방이 제대로 된 분장을 하고 단역이긴 하나 처음으로 관객 앞에 선, 설정산과 번리화가 등장하는 〈설정산정서〉를 소재로 삼은 월극이다. 국내에도 익숙한 당나라 장군 설인귀의 아들인 설정산과 번리화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번리화는 설정산 못지않게 공적을 세운 숨은 위인이기도 하다. 여성이지만 남편 못지않게 용맹한 장수였던 것. 그 또한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대장군이 굴욕을 당하고 소녀 앞에 무릎을 꿇었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이에 번리화는 설정산에게 “나와 당신은 전생에 좋은 인연을 가지고 있고, 원수지간도 아니잖소”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전생’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데, 여화와 진진방의 영화 속 재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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