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영화계의 불멸의 스타 고 장국영의 새로운 사진이 공개됐다. 장국영과 생전 연인 사이였던 당시 매니저 당학덕이 1월 1일을 맞아 장국영의 사진을 올린 것. 평소 그는 SNS에 장국영의 기일인 4월 1일과 생일인 9월 12일에 맞춰 장국영의 미공개 사진을 자주 올렸고, 크리스마스 이브나 새해에도 가끔 그의 생전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올해 2026년을 맞아 올린 사진 오른쪽 아래에는 ‘1996년 1월 1일’이라는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 타이머가 기록돼 있어, 무려 30년 전 사진임을 알 수 있다.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후, 생전 연인 당학덕의 SNS는 그의 미공개 사진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채널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은 2024년 11월 27일이었다. 위에 쓴 것처럼, 이른바 ‘중요한 날’에만 장국영의 사진을 올리다 보니 그와 무관한 ‘아무 때’나 그의 사진을 올리고 싶지는 않았을까. 1년 365일 내내 장국영 생각을 할 텐데 문득 그리워 미칠 것 같은 날이 잊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렇게 뜬금없이 이소룡의 생일이기도 한 11월 27일, 당학덕은 미공개 사진이 아닌 장국영 사진을 올리고 한 마디를 달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 ‘번역하기’를 누르는 순간, 수많은 장국영 팬들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마음을 치유하는 얼굴’이라는 말이었다. 팬들은 왜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걸까.

홍콩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 예광이 장국영의 미모를 일컬어 미목여화(眉目如畵), 즉 ‘눈과 눈썹이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아름답다’고 했다. 일단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자. 1956년 9월 12일, 원숭이띠에 처녀자리로 태어난 장국영은 무려 10남매 중 막내였다. 10남매 안에서 ‘섬’처럼 지내 온 유년기는 그의 인생과 캐릭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셋째 형, 넷째 누나, 그리고 바로 위인 아홉째 형은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떴다. 그래서 실제로는 7남매라고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죽은 아홉째 형과 그의 생일이 같았기에 가족들은 언제나 그 형이 환생하여 장국영이 태어났다고 여겼다. 나이 차이도 커서 그는 형제들과 즐겁게 어울려 논 기억이 없다. 제일 큰 누나와는 무려 18살이나 차이가 났고 가장 가까운 8번째 형과는 8살 차이가 났다. 홍콩에서 로즈리힐 스쿨(Rosaryhill School)을 다닌 그는 유명한 재단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3살 때 영국 리즈대학교 섬유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13살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로즈리힐 스쿨 역시 지난 해 폐교했다. 장국영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

영국 유학을 다녀온 것은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글램록과 데이빗 보위, 그리고 화려한 무대를 접하며 영국에서 비로소 음악에 눈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서 누구나 기억할 법한 클라크 게이블이 아니라, 스칼렛(비비안 리)이 좋아하던 젠틀한 남자 얘슐리를 연기한 레슬리 하워드를 좋아하여 레슬리(Leslie)라는 영어이름도 가져왔다. 더불어 장국영에게는 그만의 애칭인 ‘꼬고’가 있다. ‘오빠’를 뜻하는 한자 가가(哥哥)의 광동어 발음으로, ‘꺼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꼬고’가 더 귀엽게 들린다. 〈천녀유혼〉을 촬영할 당시, 왕조현이 그를 ‘꼬고’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장국영보다 무려 11살 어린 왕조현이 ‘아저씨’라 부르기는 애매하기도 하고 친구처럼 편안하고 친근하기도 하여 ‘오빠’라고 부른 것이 애칭으로 굳어지게 된 것.

1977년 홍콩 ATV 아시안 뮤직 콘테스트에서 돈 맥클린의 노래 ‘American Pie’를 불러 2위를 차지하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 장국영은, 당시 홍콩 대부분의 연예계 스타들이 그러했듯 가수로 데뷔한 뒤 배우를 겸했다. 데뷔작 〈홍루춘상춘〉(1978)을 지나 조연으로 나온 〈갈채〉(1980)에서도 그런 가수로서의 인기에 힘입어 가수 지망생을 연기했는데, 잘생긴 반항적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요약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그는 ‘아비’였다. 배우로서 그의 첫 번째 메가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위니종정〉(1985)에서도 우연히 만난 여려진(이려진)에게 반하여 무턱대고 같은 버스에 올라타 쫓아가는 남자였다. 이후의 히트작들인 〈연분〉(1984)과 〈살지연〉(1988)에서도 비슷했다.

돌이켜보면, 〈아비정전〉(1990)의 첫 장면도 그렇다. 아비(장국영)는 수리첸(장만옥)에게 대뜸 다가가 자신의 시계를 1분만 같이 보자고 하고는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같이 있었어. 난 그 1분을 기억할 거야”라는 말을 건넨다. 시작만 보자면 이전 장국영 영화와 별 다를 바 없는 설정이다. 하지만 〈아비정전〉은 그 이상의 고독과 허무를 머금은 아비 캐릭터를 통해, 배우 장국영에게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게다가 〈아비정전〉은 홍콩 최초의 동시녹음 영화였기에 캐릭터에 대한 몰입과 배우로서의 호흡과 리듬도 중요했다. 당시 홍콩영화들은 스타 모셔가기 경쟁이 심했던 탓에, 스케줄이 바쁜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촬영을 시작하고 나중에 후시녹음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기에, 〈아비정전〉은 그야말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아비라는 캐릭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예술가 장국영의 바람이 깊이 담겼다고나 할까. 그러한 도전은 〈열혈남아〉(1988) 이후 두 번째 영화 〈아비정전〉으로 2살 많은 형이자 대스타인 장국영과 함께 한 왕가위의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이후 장국영의 화려한 전성기가 시작됐고, 국내에서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영웅본색〉 개봉으로부터 불과 1년 뒤인 1988년 7월 22일 개봉한 〈영웅본색2〉는 개봉 첫날부터 인산인해를 이뤘다. 3편까지 만들어진 〈영웅본색〉 시리즈를 통틀어 여러 명장면이 즐비하지만, 그중에서도 많은 팬들은 〈영웅본색2〉에서 장국영의 노래 ‘분향미래일자’가 흐르는 가운데 장국영이 주윤발의 품에 안겨,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아내와 통화하며 죽어가는 장면을 꼽을 것이다. 이듬해 1989년 그는 우리나라에서 ‘투유’ 초콜릿 CF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당시만 해도 해외 스타가 국내 광고를 찍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때다.

그처럼 데뷔 이후 배우이자 가수로서 거의 모든 시기가 전성기였기에 무의미한 얘기일 수도 있으나, 특히 〈아비정전〉을 시작으로 〈동사서독〉(1994)과 〈해피 투게더〉(1997) 등 왕가위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어 함께 한 작품들은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이다. 더불어 각고의 노력으로 경극 배우로 변신해 그의 탁월한 예술가적 자존심을 보여준, 그리하여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패왕별희〉(1993), 〈동사서독〉의 배우 임청하와 다시 만난 〈백발마녀전〉(1993), 음악 프로듀서로 출연해 현대 로맨틱 코미디물 〈금지옥엽〉(1994), ‘A Thousand Dreams Of You’라는 노래로 기억되는 〈야반가성〉(1995), 가난한 영화감독으로 출연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색정남녀〉(1996) 등을 거치며 그는 불멸의 배우가 됐다.

장국영을 새로이 떠올리게 해준 영화는 바로 야쿠쇼 코지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퍼펙트 데이즈〉(2023)다. 1956년생 동갑내기인 장국영과 야쿠쇼 코지는 마흔 살 나이의 1997년, 〈해피 투게더〉와 〈우나기〉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동시에 초청되며 만난 적 있다. 전자는 감독상, 후자는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배우로서 각자의 정점을 찍었던 것. 그처럼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가 희한하게 장국영 생각을 하게끔 했다. 어쩌면 어떻게든 매 순간 장국영을 떠올리기 위한 과몰입증후군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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