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어쩔 수 없이, <침묵>은 최민식을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최민식이라는 거대한 배우의 무게가 없었다면 자기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용의자로 몰린 상황을 견뎌야 하는 임태산의 고뇌가 빛을 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침묵>을 떠올릴 때 가장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배우는 임태산의 딸 미라 역의 이수경이다. 상황에 따라 상반된 이미지의 미라'들'을 온전히 아직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한 이의 외로움으로 설득해내는 에너지는 즉각적으로 어마어마한 재능을 목격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침묵>의 이수경'을 만나고 싶었다.


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2012년 첫 단편 <여름방학>을 촬영할 때부터 이수경은 "머리 길이부터 키, 몸무게, 습관, 종교까지 별별 것들을 다 준비"해서 현장에 가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첫 상업영화 <차이나타운>을 작업할 때 그 방식의 한계에 부딪혔다. 촬영 현장이란 늘 변수투성이기 때문에 혼자 준비한 설정들이 틀어지기 일쑤였다. 메이저 신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돼 배우를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확신이 섰어도 촬영 내내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돌파구는 금방 찾아왔다. <차이나타운>을 마치고 곧 드라마 <호구의 사랑>을 촬영하면서, 드라마 특유의 빠듯한 제작 환경으로 무언가 미리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마음도, 연기도 수월해지는 걸 느꼈다. 그 이후부터는 캐릭터의 중요한 감정 몇 가지만 확실히 세워놓고 현장에 임했다.

침묵

하지만 <침묵>의 미라는 평소보다 많은 걸 준비해야 했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버지의 애인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미라는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은 극한의 상황"에 놓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사랑을 배우지 못해 외로운 걸 비뚤게 표현하는 어린 애"라는 점을 중심에 세우고, 미라가 처한 여러 상황들에 충실한 모습을 딱딱 구분해서 표현했다. 마음에 차지 않는 아버지의 애인 유나(이하늬)에게 험한 말을 내뱉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준 변호사 희정(박신혜) 앞에서 무구한 눈으로 의지할 때, 전혀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맞닥뜨릴 때, 미라는 모두 다른 사람 같았다. 이수경이 펼쳐 보인 여러 얼굴의 미라는 그녀가 영화의 유일한 용의자라는 걸 새삼 확인시키며 스릴러의 장력을 유지한다.

차이나타운 / 특별시민 / 용순

제멋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홍머리 쏭(<차이나타운>), 정치인인 아버지 대신 뺑소니 누명을 써야 하는 아름(<특별시민>), 몽골 여자를 새엄마로 데려온 아빠와 몰래 연애 중인 체육선생 때문에 늘 화가 나 있는 고등학생 용순(<용순>) 등 영화 속에서 주로 센 역할을 맡아온 이수경에게 <침묵>은 보다 많은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많은 면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지만,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어요. 하지만 잘해낸다면 득이 될 수 있는 거니까 좋았죠." 첫 주연작 <용순>보다 조연을 맡은 <침묵> 속 이수경에 대한 칭찬이 보다 확연히 들리는 건, 비단 영화의 규모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침묵

상대배우와의 호흡은 이수경의 연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들의 조언을 따른다거나 스타일을 참조한다는 건 아니다. 눈 앞에 있는 배우가 던지는 연기를 받아 그에 맞는 에너지와 대사를 돌려주는 식으로 상황 속의 인물에 살을 붙여나간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동성식 검사(박해준)가 미라를 호되게 심문하는 신. 증인석의 미라는 겁에 질린 아이마냥 눈물을 쏟으며 검사의 공격을 받는다. "처음엔 그렇게 울면서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그때 박해준 선배가 너무 무서웠어요. 제 앞에서 그렇게 따지고 드는 게 무서워서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선배가 도와준 거죠." 유나(이하늬)의 과거를 두고 미라와 유나가 화장실에서 싸우는 장면도 마찬가지. 애초엔 미라가 용의자가 될 만한 근거로 쓰일 만한 정도의 말싸움이었지만, 이하늬와 격한 말들을 주고 받다보니 자연스럽게 욕설까지 내뱉는 수위의 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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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 이수경이 흥미로운 건, 그녀가 어느 배우 앞에서도 주눅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수경 스스로도 배우로서의 장점을 "사실 기가 죽었는데도 겉으로는 기죽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소엔 남 앞에서 말하는 거에도 별로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연기할 때는 자신감이 생겨요. 내가 아니니까, 이건 모두 짜여진 게 있는 거니까 거기서 무슨 짓을 해도 나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연기일 뿐이지. 그래서 상대방을 어려워해야 할 필요도 없어요." 심지어 취조실에서 태산과 미라가 만나는 신조차, 패륜적인 말을 내뱉는 이수경의 태도는 최민식의 기운에 전혀 위축됐다는 기색이 전혀 없다. 최민식을 비롯한 박신혜, 이하늬, 박해준, 조한철 등 배우들의 좋은 연기력으로 가득한 <침묵>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대했던 이수경의 일취월장이 가능했던 것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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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과는 <특별시민>에 이은 두 번째 협업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에서 모두 부녀지간이고, 각자의 잘못이 상대방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최민식은 <특별시민>에서 이수경의 가능성을 보고 <침묵> 제작진에게 그녀를 추천했고, 이수경은 <특별시민>에서 짧게 함께했던 아쉬움을 채우고 싶어 <침묵>에 대한 뜻을 키웠다. "우는 연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에요. 상황에 100% 납득돼야 하고 분위기도 잘 타야 해서 시동거는 데 오래 걸려요. 민식 선배는 제 연기 방식을 알고 그에 맞는 환경을 잘 만들어주셨어요." 클라이막스에서 태산과 미라가 만나는 신에서 폭발하는 감정 역시 이번이 두 번째 작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연기였다고. "처음 보는 민식 선배의 모습이었어요. 그때까지 본 이래 가장 수척한 모습이었거든요. 아빠와 딸 역할로 1년 내내 보고, 인간적으로도 선배에 대한 좋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이 그렇게 슬펐어요."

더 많은 대중들이 이수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소문을 듣고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이수경 입덕 캐릭터'를 추천해달라고 하자 그녀는 "저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지금 극장에 걸려 있는 <침묵>부터 봐주시고" 하고 운을 떼고는 "저의 가장 평범한 모습이자 저와 가장 많이 닮은" <용순>의 용순을 꼽았다. 마음 둘 친구 없이 외롭게 성장한 <침묵>의 미라와 달리, 용순은 친구들의 응원으로 사랑의 아픔을 이겨내는 아이다.

이수경의 차기작은 정재영, 김남길, 엄지원 등과 함께하는 <기묘한 가족>이다. 이수경의 첫 코미디 영화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과는 많이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내년 개봉인 영화라 말을 아꼈지만 2012년부터 이수경이 부지런히 연기한 인물들에게서 그 흔적을 예상해보면 어떨까.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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