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영화가 뭐야?” 12월이라 자연스러운 동료 에디터의 질문. 선뜻 생각나는 영화가 없었다. “올해는 영화를 너무 안 봐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정말 생각나는 영화가 없었다. 올해 괜찮은 영화가 없었던가. 예년에 비해 분명히 영화를 적게 본 것 같긴 하다. “<겟 아웃>을 어제서야 보긴 했어”라고 덧붙였다. <겟 아웃>은 거의 모든 해외 매체에서 선정한 2017년 베스트 영화 리스트에 포함된 영화였다. 뒤늦은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겟 아웃>을 봐야 할 것만 같았다. “내가 올해 놓친 영화가 또 뭐가 있을까?” 이번엔 나의 질문. 동료 에디터가 뭐라고 답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깐. 다른 영화 한 편이 머릿속을 스쳤다. 테일러 쉐리던의 <윈드 리버>다.

윈드 리버

감독 테일러 쉐리던

출연 엘리자베스 올슨, 제레미 레너

개봉 2016 미국, 영국,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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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미쳤네, 미쳤어.” <윈드 리버>가 끝나자마자 소리쳤다. 정말 소리내서 말했다. 극장이 아니라 혼자 사는 에디터의 집, 거실이라 민폐가 될 일은 없었다. “아, 극장에서 봤어야 하는데.” 아쉬움의 탄식도 연이어 터져 나왔다. “테일러 쉐리던, 진짜 대박이네.” 혼잣말이 계속 됐다.

<윈드 리버>를 보기 전, 테일러 쉐리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테일러 쉐리던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가다. <윈드 리버>에서는 직접 연출까지 맡았다. 이 3편의 영화가 테일러 쉐리던의 이른바 ‘국경 3부작’(Frontier Trilogy)이다. <시카리오>는 멕시코 국경 도시 후아레즈, <로스트 인 더스트>는 텍사스, <윈드 리버>는 와이오밍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다. 3편 모두 그 지역의 특수한 상황이 영화의 주제와 분위기를 좌우한다.

<윈드 리버>는 인디언, 미국 원주민 보호구역인 윈드 리버 산맥의 설원에서 시작된다. 한 소녀가 맨발로 설원을 달리다 쓰러진다. 소녀는 피를 토해낸다.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는 퓨마를 추적하다가 소녀의 시체를 발견한다. 소녀는 3년 전 실종된 코리의 딸과 친한 친구, 나탈리였다. 라스베가스(!)에서 신참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이 사건 수사를 위해 파견된다. 제대로 된 외투도 챙기지 않은 그녀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낯선 와이오밍에 적응하지 못한다. 제인은 코리에게 도움을 청한다. 코리는 퓨마 대신 살인자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사실 <윈드 리버>를 보기 전에는 큰 기대가 없었다. <시카리오>는 드니 빌뇌브, <로스트 인 더스트>는 데이빗 맥킨지 감독의 공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를 봤기 때문에 엔딩 크레딧을 보며 “테일러 쉐리던 대박!”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됐다. ‘설마 연출까지 잘 하겠어?’라는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기서 더 나가서 어쩌면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가 드니 빌뇌브, 데이빗 맥킨지의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냐면 <윈드 리버>의 후반부 클라이맥스가 묘하게 앞의 두 영화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의 빽빽한 긴장감 역시 감독이 아닌 각본가 테일러 쉐리던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윈드 리버>에서 찾아낸 앞선 영화들의 흔적을 추적해보자. 코리와 제인은 현지 경찰의 지원을 받아 용의자가 있는 깊은 산속 공사장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하늘에서 이 차량 행렬을 비춘다.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도 이런 구도의 장면을 본 것 같다. 제인 일행과 용의자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이한다. 서로 총구를 겨누는 상황? 누가 총을 먼저 쏘는가. 대번에 <시카리오>의 국경 시퀀스가 떠오른다. 단지 장소만 눈밭으로 바뀌었을 뿐. 제인 일행과 떨어진 코리는 산을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에게는 스나이퍼 라이플이 있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늙은 텍사스 레인저(제프 브리지스)도 스나이퍼 라이플이 있다. 그는 은행 강도로 은행 빚을 갚는 <로스트 인 더스트>의 주인공 태너 하워드(벤 포스터)를 조준한다.

<윈드 리버>가 <시카리오>와 <로스트 인 더스트>와 다른 점이 있다면 좀더 감정적이라는 점이다. 테일러 쉐리던은 후아레즈와 텍사스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자연스레 미국 사회의 병폐들, 마약(<시카리오>), 금융 자본주의(<로스트 인 더스트>) 문제를 부각시켰다. <윈드 리버>에서는 직접적이다.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잊혀진 삶을 살아가는 원주민 여성에 대한 범죄 실상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건 분명 복수다.

어쩌면 에디터의 생각과 달리 테일러 쉐리던이 앞선 두 영화 감독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된 연출 수업을 받은 셈이다. 어쨌든 테일러 쉐리던 각본, 연출의 <윈드 리버>는 내가 볼 땐 ‘대박’이었다. 에디터가 뒤늦게 <겟 아웃>을 본 것처럼 <윈드 리버>를 놓쳤다면 관람 리스트에 올려보길 바란다. 

그런데 <겟 아웃> 말고 또 챙겨봐야 할 영화가 뭐가 있을까. 씨네플레이 ‘올해의 영화’ 리스트를 만들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