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 팬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흑인 운전자가 도로변에서 두 명의 백인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폭행당하고 있다. 넘어진 흑인 운전자는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되레 백인 경찰 한 명이 더 가세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짓밟는다. 쓰러진 채 꿈쩍도 하지 않는 흑인에게 폭력은 계속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이 폭행 장면은 익명의 시민에 의해 촬영됐고 곧 전파를 타고 미국 전역에 전해진다. 백인 경찰에 의해 일어난 잔인한 폭행은 공권력에 의한 인종차별 논쟁으로 확산된다. 그로부터 1년 뒤 폭행에 가담한 경찰관들이 무죄로 풀려나자 분노한 흑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1992년 4월 29일부터 6일 동안 계속된 이 폭동으로 55명이 숨지는 등 미국 사회는 큰 상처를 받고 만다.
<블랙 팬서>의 첫 장면은 LA 흑인 폭동의 시공간에서 일어난다. 1992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미국에서 스파이로 활동 중인 와칸다 국왕 티차카(존 카니)의 동생 은조부(스터링 K. 브라운)는 백인들의 억압적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흑인들이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흑인 급진세력의 무장을 위해 와칸다의 비밀 무기인 비브라늄을 빼돌린다. 영화 <블랙 팬서>는 LA 흑인 폭동이라는 미국 흑인 민권운동 역사의 비극적인 순간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이 영화가 단순한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아닌, 흑인들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전한다.
유색인 전용 버스 좌석, 유색인 출입금지 식당. 흑인은 다닐 수 없는 학교. 믿기지 않겠지만 20세기 중반 자유주의의 상징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1954년 공립학교의 인종차별에 대한 항거를 시작으로 불붙은 흑인 민권운동은 1960년대 말까지 미국 사회 전반에 큰 변혁을 가져다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1966년 7월 탄생한 최초의 흑인 슈퍼히어로 ‘블랙 팬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와칸다의 국왕 티차카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티찰라(채드윅 보스만)가 왕위를 물려받으며 블랙 팬서가 된다. 왕위에 오른 그는 30년 전 와칸다 국민을 살해하고 비브라늄을 훔쳐간 율리시스 클로(앤디 서키스)의 행방을 알아내 그를 잡기 위해 부산으로 떠난다. 하지만 티찰라는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에게 다잡은 클로의 신병을 빼앗기고, 강인한 왕을 원하는 와칸다 내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흔들리게 된다. 숙원이던 클로를 제거한 킬몽거는 자신이 은조부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밝히며 와칸다의 왕좌에 도전한다. 남겨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방관과 비폭력을 주장하는 티찰라와 억압받는 흑인들을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급진파 킬몽거는 각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싸운다. 이러한 티찰라와 킬몽거의 대립은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대표적인 운동가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티찰라와 킬몽거의 대립이 봉합되는 과정을 통해 흑인 인권에 대한 방관적인 태도와 급진적인 폭력적 태도 모두에서 벗어나자고 말한다. 뿌리 깊은 흑인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선한 의도가 비극적으로 발현된 LA 흑인 폭동 같은 실패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순간이다. <블랙 팬서>는 미국 흑인 민권운동사를 영화 깊숙이 끌어들이면서 흑인 관객만이 아니라 보편적 대중을 겨냥한 새로운 ‘블랙필름’의 사례를 제시했다. 제작진은 이 같은 시각을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겟 아웃>(2017) 등 트럼프 시대의 블랙필름 흥행의 연장선 위에 <블랙 팬서>가 서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영화는 다시 왕위를 되찾은 티찰라가 삼촌 은조부가 살던 오클랜드의 아파트를 찾아 이곳에 흑인들을 위한 지원센터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어린 킬몽거가 뛰어놀던 자리에 또 한명의 아이가 서서 이 장면을 바라본다.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이 아이가 영화 <문라이트>(2016)에서 리틀을 연기한 알렉스 R. 히버트 임을 단박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것이 의도적인 설정인지 캐스팅 과정의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아이가 <문라이트>에서 빈곤한 성소수자 흑인을 연기했었다는 점에서 <블랙 팬서>가 지닌 희망적인 설정과 부합하는 것임엔 틀림없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심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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