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디 버드>,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보이후드>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매료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레이디 버드>를 호명할 때마다 나온 가지각색 클립들을 보자마자 반해버리고 말았다. 통통 튀는 대사, 그를 보며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영화인들. 배우 그레타 거윅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점,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시얼샤 로넌이 질풍노도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도 흥미로운데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다섯 부문이나 노미네이트 됐다니. <레이디 버드>가 지닌 에너지가 궁금해졌다. 그 누구도 ‘사랑의 형태’를 정의할 수 없다 말하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입 닫고 살라는 사회에 강력한 저격 메시지를 날린 <쓰리 빌보드>, 영화를 ‘체험’으로 승화시킨 <덩케르크>, 팽팽한 긴장을 촘촘히 엮은 <팬텀 스레드>… 이와 어깨를 나란히 한 <레이디 버드>에도 감히 예측할 수 없는 ‘강펀치’가 있겠지, 확신했다.

부푼 마음이 꿉꿉해졌다
드디어 <레이디 버드>를 보던 날. 부푼 마음을 안고 극장에 들어섰고, 고개를 갸웃하며 극장을 나왔다. 구질구질한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 우월해 보이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망, 엄마 매리언(로리 멧칼프)과의 치열한 사랑까지. 스크린 속 레이디 버드(시얼샤 로넌)의 인생에 내 스무 살 언저리 시절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이게 뭐야, 너무 빤하잖아. 공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레이디 버드보단 그녀의 주변 인물들에 더 마음이 갔다. 레이디 버드를 따라 제 이름에도 따옴표를 붙이던 줄리(비니 펠드스타인)의 마음,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레이디 버드에게 폭 안겨 울음을 터뜨리던 대니(루카스 헤지스), 딸에게 선뜻 ‘좋아한다’ 입을 떼지 못하던 순간 매리언의 얼굴에 스친 당혹감. 94분 안에 다양한 인물 군상을 담아낸 리듬감이 뛰어났고, 대사 대신 많은 걸 설명하던 작은 디테일들이 사랑스러웠지만, 그뿐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꿉꿉했다. 도대체 남들 다 좋다는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심심한 걸까. 문득 그 공허함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보이후드>

한 뼘 자라나는 순간들
성장 영화를 좋아한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와 <보이후드>는 <레이디 버드>처럼 흘러가는 일상과 그 사이 작은 균열을 조명한 영화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의 마에다(카미키 류노스케)는 자신이 영화감독이 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영화가 좋다는 이유로 8mm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키쿠치(히가사데 마사히로)는 마에다를 보며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가족의 12년이 꼬박 담긴 <보이후드>에서 여섯 살 꼬마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은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것’을 느끼는 소년으로 성장한다. 인물들이 한 뼘 자라는 순간 전해지는 감동. 마음을 뒤흔드는 메시지는 성장영화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성장영화뿐만 아니라 갖가지 장르의 영화에서 그런 순간들을 꼬집어내 감동과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 역시 성장한 기분이 들고 마음 한구석이 포근해졌다.

레이디 버드는 지긋지긋한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나는 데 성공한다. 뉴욕에 새 터전을 꾸린 레이디 버드의 삶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레이디 버드’로 생활했던 그녀는 뉴욕에 가서 자신을 본명 ‘크리스틴’으로 소개한다. 도착한 첫날 하는 일이라곤 새크라멘토에서도 늘 해왔던 파티. 술에 취해선 대니와의 사랑 언어였던 “브루스!”를 외치고, 결국 만취한 채 응급실에 실려와 화장이 잔뜩 번진 얼굴로 아침을 맞는다. 술에서 깬 그녀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은 학창시절 늘 함께했던 성당. 성가대의 음악을 듣고 나온 크리스틴은 집에 전화를 걸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다. 전해지지 못한 엄마의 편지처럼, 크리스틴은 답 없는 자동응답기에 대고 엄마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몸을 배배 꼬며 낯간지러운 말을 늘어놓은 크리스틴은 황급히 전화를 끊고, 앞으로 어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렇게 영화가 끝난다. 새크라멘토에서나 뉴욕에서나 그녀의 삶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시시하고 심심하고 허무한 현실
내게 성장영화는 하나의 판타지였다. <레이디 버드>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레이디 버드’스러운 요란한 성장담이 나열되고, 그녀가 결국 가족들에게 인정받으며 멋진 뉴요커가 되길 바랐다. <레이디 버드>는 전형적인 성장영화의 틀을 벗어난다. “나는 레이디 버드야”가 “나는 크리스틴이야”가 되는 시시함. 낭만적인 대사도, 감동을 증폭시키는 음악도, 달콤한 위로의 메시지도 없는 심심함. 끝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진심을 나누지 못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 오는 허무함. <레이디 버드>의 결말에 버무려진 모든 감정이 결국 진짜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곳을 떠나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말겠다는 레이디 버드의 선언은 나 역시 줄곧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레이디 버드>는 지긋지긋한 울타리를 벗어나고 나서도 결국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곳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꿈꾸던 곳을 향하는 게 끝이 아니라, 그곳에서도 지긋지긋한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늘 막연한 곳에서의 멋진 삶을 꿈꾸던 환상을 와르르 무너뜨린 결말. 달콤한 사족을 쏙 뺀 <레이디 버드>의 결말은 매리언의 잔소리 같다. 아픈 곳을 정확히 짚어서 듣기 싫지만, 자꾸 곱씹게 되고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는 엄마들의 잔소리.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것. 결국 <레이디 버드>에 마음을 뺏기고 만 이유다.

레이디 버드

감독 그레타 거윅

출연 시얼샤 로넌

개봉 2018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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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

출연 카미키 류노스케, 하시모토 아이, 오고 스즈카

개봉 201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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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엘라 콜트레인, 에단 호크, 패트리샤 아퀘트, 로렐라이 링크레이터

개봉 201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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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