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쳐(Vulture)와 리프린트 계약을 맺고 번역한 콘텐츠를 편집한 글입니다. (글 : 캐서린 반아렌돈크)
HBO 인기 드라마 <웨스트월드> 평균 러닝타임은 약 한 시간가량이다. 지난 22일, 시청자들의 기대를 받으며 돌아온 시즌 2 첫 에피소드는 69분 동안 방영됐다. 지난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가 꽉 채운 90분이었던 걸 감안하면, 짧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앞으로 한 시간 넘도록 방영할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5월 13일 방영 예정 4화 ‘The Riddle of the Sphinx’의 러닝타임은 71분이다)
<웨스트월드>를 즐겨보면서도 한 시간이 넘는 에피소드를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고 길게 부풀리는 것에 일말의 실망감을 느낀다. 드라마 전개상 60분이라는 분량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 시간을 투자할 의향이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긴 에피소드는 작품의 서사보다는 오만함을 뽐내거나 스케일을 과시하고자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제작진은 서사 공간을 드라마 전개와 거리가 먼 지루한 요소로 채우며 우리들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TV 드라마의 긴 에피소드는 그들이 그만한 공간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은연중에 풍기며,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대우받게 한다. 방영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훌륭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무분별하게 분량을 늘리는 제작 행태는 마치 지하철에서 다리를 최대로 벌려 앉는 쩍벌남과 다름없다. 에피소드를 질질 끄는 경향은 ‘크기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개념을 시청자들에게 강제 주입하며 부담을 준다. 이제는 무의미한 과시를 일삼는 스토리텔링의 ‘쩍벌남’스러운 행위에 경종을 울릴 때가 왔다.
불필요한 분량이 증가하는 현상은 <웨스트월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드라마의 강점은 부정할 수 없는 미학과 예상치 못한 한방의 순간들이다. 하지만 사소한 원인에서 발발한 폭력으로 마무리되는 여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즉, 드라마의 토대가 되는 스토리텔링이 약화되고 있다. 반복되는 총격전은 특유의 스펙터클로 시청자를 사로잡지만, 정작 드라마에서 중요한 부분을 희석하며 점점 고조되는 작품 분위기에도 제동을 건다. 시즌 1 내도록 중요한 서사는 테마파크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암시했으면서, 도대체 왜 ‘검은 옷의 사나이(에드 해리스)’가 종일 다른 사람을 뒤쫓는 모습을 봐야 하는지 의문이 들며, 과하게 긴 에피소드는 실망스럽기만 했다. 불필요한 과잉을 없앤다면 더 좋은 드라마가 될 거라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는 비단 <웨스트월드>만의 문제는 아니다. TV 에피소드의 ‘쩍벌남’스러운 행위는 43분가량의 지상파 드라마가 아닌 보통 1시간 내외 러닝타임으로 방영되는 HBO와 같은 케이블에서 시작됐다. 이런 경향은 FX에도 영향을 미쳐 <닙 턱>, <쉴드>를 시작으로 <썬즈 오브 아나키>에서 정점을 찍었다. <썬즈 오브 아나키>는 시리즈 중반 이후 1시간도 부족해 90분짜리 에피소드를 습관적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중간 광고도 늘렸다. 버라이어티는 ‘프리미엄 케이블에서 자행되는 장시간 러닝타임’이란 주제로 기사를 쓰기도 했다. FX CEO 존 랜드그라프는 방영 시간을 늘리는 것은 HBO와 쇼타임의 창의력을 따라갈 기회라고 언급했다. 방영 시간이 창의력과 비례하며 작품 성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이 계속해서 확장되는 게 문제다. FX <리전> 시즌 1 최장 러닝타임은 50분이었으나 지난 4월 3일 방영된 시즌 2 첫 에피소드 러닝타임은 61분이나 된다. 이는 노아 홀리의 또 다른 FX 시리즈 <파고>도 마찬가지다. 물론 <아메리칸즈>처럼 분량 증가가 타당하게 느껴지는 드라마도 있다. 다른 방송국 드라마를 예로 들면, USA Network <미스터 로봇>이나 TNT의 <에일리어니스트>, <애니멀 킹덤>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HBO는 앞서 언급한 방송국보다 심각하다. <웨스트월드>와 <왕좌의 게임>은 물론, 최근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라진 신작 <히어 앤 나우>도 60분을 살짝 넘는다. 2016년 초 선보였던 드라마 <바이닐> 파일럿 에피소드는 무려 두 시간을 꽉 채웠다.
‘길수록 훌륭한 작품이다’라는 인식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옮겨가 기본적인 운영 방침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아메리칸 반달리즘>처럼 가뭄의 단비 같은 짧은 드라마도 있지만, 대체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는 지나치게 길다. 왜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되는 것일까. 작품 자체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서비스 이용자의 시청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65분을 50분으로 줄여 제작하라는 압박은 아마 없을 것이며, 사실상 정반대 양상으로 흘러간다. 넷플릭스 CEO가 서비스의 가장 큰 적은 ‘잠’이라고 말한 일화는 이 같은 제작 방식을 단번에 설득한다. 넷플릭스 비즈니스 모델은 작품의 러닝타임을 늘여 시청자들이 남는 시간을 모두 자사 서비스에 쏟아붓게 하는 거라 볼 수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드라마 에피소드만 길어지는 게 아니다. <마스터 오브 제로>, <애틀랜타>, <걸스>처럼 광고 포함 30분 분량의 전통 코미디도 종종 35분으로 제작된다. 코미디 작품은 드라마에 만연한 오만함이 잘 보이지 않으며, ‘예술적인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늘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애틀랜타>는 가장 좋은 예다. 지난 4월 5일, 35분 분량으로 방영된 두 번째 시즌 6화 ‘Teddy Perkins’는 탁월한 완성도로 시청자와 비평가에게 찬사를 받았다.
러닝타임을 늘리는 게 꼭 필요할까. 사람들은 HBO의 1시간짜리 에피소드에 길들여진 나머지 40분가량의 러닝타임으로도 <제인 더 버진>,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와 같은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 올해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 <바빌론 베를린>은 미국 프리미엄 케이블 작품만큼이나 몰입력이 높으며, 무엇보다 모든 에피소드 러닝타임이 50분 미만이다.
이제 불필요하며 때로는 해로운 ‘쩍벌’ 현상에 관심을 가질 때다. 분량을 늘려 몸집을 키우는데 급급한 방송사에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이는 내 귀중한 시간을 호소할 뿐 아니라 <웨스트월드> 같은 작품이 무의미한 보여주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더 효과적이며 양질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함을 말한다.
- 웨스트월드 : 인공지능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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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안소니 홉킨스, 제임스 마스던, 에반 레이첼 우드, 제프리 라이트, 탠디 뉴튼, 로드리고 산토로, 에드 해리스, 섀넌 우드워드, 안젤라 사라피언, 시드 바벳 크누센, 지미 심슨
방송 2016, 미국 HBO
- 웨스트월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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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에반 레이첼 우드, 탠디 뉴튼, 제프리 라이트, 제임스 마스던, 루크 헴스워스, 시드 바벳 크누센, 로드리고 산토로, 안젤라 사라피언, 섀넌 우드워드, 에드 해리스, 안소니 홉킨스, 벤 반스, 클리프톤 콜린스 주니어, 지미 심슨, 테사 톰슨, 탈룰라 라일리, 루이스 허텀, 카챠 헤르베스, 닐 잭슨, 페레스 파레스
방송 2018, 미국 HBO
번역 Tomato92, 편집 Jacinta / 에그테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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