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대사로 기억된다. 별생각 없이 스크린을 바라보던 내 마음에 발자국을 꾹 남기는 영화들. 그런 영화의 대사는 현실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보다 큰 위로를 건네고, 공감해주고, 용기를 주고, 또 깨달음을 준다. 그런 작품들은 영화 자체가 크게 좋지 않아도, 영화 속 인물이 건넨 말 한마디가 강렬해 오래도록 기억되기도 한다. 내게 큰 울림을 준 영화 속 대사들을 함께 나누어보려고 한다.

<열쇠도둑의 방법>

1.
초등학교 시절, 한 학기 혹은 학년이 끝나면 통지표가 날아왔다. 통지표 맨 뒷장엔 꼭 담임선생님 말씀이 쓰여 있었는데, 대개 “의지는 있으나 끈기 부족, 실천력 부족” 이런 말들이었다. 그랬던 아이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대로 자랐다. 그렇게까지 그대로 자랄 필요는 없었는데, 뭐 그렇게 되어버렸다.

“네 방에 있던 스타니슬랍스키 책, 처음 8페이지 밖에 읽은 흔적이 없더라고. 다른 책도 전부 그랬다. 조금 의욕을 내고 공부하려고 해도 책 산 것만으로 만족해버리는 가장 몹쓸 인간이잖나 네놈은!”

뜨끔했다. <럭키> 개봉 즈음 원작이 궁금해 찾아본 영화 <열쇠도둑의 방법>에서 나온 대사다. 콘도(카가와 테루유키)가 사쿠라이(사카이 마사토)를 질책한 말은, 하고 싶은 것만 많고 늘 말만 거창한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계획 짜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진 새해 다짐을 월 단위로 세웠다. 1월부터 12월까지 달마다 할 일을 죽 적어놓고, 더 나아가서는 주 단위로 쪼개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 수많은 계획들을 다 지켰냐고? 두 번째로 잘하는 건 미루는 것이다. 그 주에 못한 건 그다음 주로, 이번 달에 못한 건 다음 달로 미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끝내 지켜낸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계획을 짜고 그것만으로 만족해버리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콘도의 말에 깨달음을 얻고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계획을 월 단위로 짜는 걸 그만두었다는 것 정도.

<비포 선셋>

2.
학창시절 치열하게 공부한 건 아니었지만, 그 나이 때 아이들이 그렇듯 내내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압박감 속에 지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였던 그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가니 족쇄가 풀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줄곧 묶여지내다 갑작스레 뚝 떨어진 자유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늘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었다. ‘의지박약’ 탓에 대단한 걸 해낸 건 없었지만, 그 강박만으로도 나의 스무살은 참 지겹고 피곤했다. 그러던 차에 떠난 해외여행은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10대 때 바르샤바에 가서 특별한 경험을 했어. 2주쯤 지냈는데 어떤 변화가 느껴지더라. 회색빛 우울한 도시가 머릿속에 점점 또렷이 각인되는 거야. 일기도 많이 쓰게 되고 온갖 생각이 떠올랐지. 변화의 이유를 깨닫지 못하던 차에 하루는 유대인 묘지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어. 그 2주는 내 일상과 완전히 달랐던 거야. TV에서 나오는 말은 들어도 모르겠고, 쇼핑할 일도 전혀 없이, 내 생활은 그냥 산책과 사색, 글쓰기 뿐이었지. '소비’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쉬고 있다는 느낌. 정말 황홀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어. 뭔가를 사야겠다는 정체 모를 압박감도 사라지고, 처음에는 좀 지루했지만 곧 영혼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됐지.”

<비포 선셋>을 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9년 만에 재회해 셀린느(줄리 델피)가 제시(에단 호크)에게 내뱉은 말들은, 9년 전 미국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밟고 돌아와 주절주절 써 내려간 내 일기장 속 단어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한창 조급함에 쫓기며 나 자신을 채찍질하던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보내는 일은 그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쉼이었다. 셀린느가 말하는 ‘정체 모를 압박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짧은 여행이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뒤이어 말한 ‘영혼의 깊이’까지는 느낄 수 없었다. 다시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땐 내 영혼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싶다. 

<심야식당>

3.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가던 시기, 이상하게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던 겨울이었다. 버티고 버티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매일 펑펑 울어내도 그 순간뿐이었지 크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렇다면 얼마나 걸릴까. 연말이 가고, 연초가 와도 나이 빼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고 그냥 이 시간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우울한 날들이 계속됐다.

“역시 무슨 사정이 있었군요. 사정 모르는 저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가벼운 말만큼 덧없는 건 없으니까요.”

도쿄 뒷골목에 자리한 밥집 ‘심야식당’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손님들이 찾아온다. 마스터(코바야시 카오루)는 굳이 그들의 이야기를 캐묻지 않는다. 다만 음식을 내주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준다. 혼자 온 손님도, 여럿이 온 손님도 있고, 가게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단골손님들도 있다. 사실 <심야식당>이 썩 재밌지는 않았다. 건조한 얼굴로 장면을 응시하던 중, 손님들 중 한 명이 다른 손님에게 건넨 저 대사가 참 크게 와닿았다. 우린 위로를 참 쉽게 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들어주는 게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위안을 줄 때가 있다.

<에브리바디 원츠 썸!!>

4.
“죽을 땐 생전에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아. 못 해본 일들을 후회하지.”

최근 가장 많이 되뇌고 있는 건 바로 이 대사다. <비포 선셋>에 이어 또다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 속 대사. 자꾸만 곱씹어 보게 된다. 선택지 여러 개를 앞에 두고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모두 다 선택하고 싶거나, 반대로 무엇도 선택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럴 때면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내일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면 의외로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 맞다. 피네건(글렌 포웰)의 말대로, 죽을 땐 못 해 본 일들을 후회한다. (물론 저들은 저 장면 이후에 진흙 싸움(?)을 하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수많은 문이 앞에 놓여있다. 문고리를 당겼다가 실망하거나 후회하기가 두려워 문 여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면 영영 문 너머의 세상을 모르고 살게 된다. 후회하기 전에 못 해 본 일들을 해보는 건 어떨까. 오늘부터 하루에 하나씩.


열쇠 도둑의 방법

감독 우치다 켄지

출연 히로스에 료코, 사카이 마사토, 카가와 테루유키, 아라카와 요시요시, 모리구치 요우코

개봉 2012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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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개봉 200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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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

감독 마츠오카 조지

출연 코바야시 카오루, 오다기리 죠

개봉 2015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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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원츠 썸!!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블레이크 제너, 조이 도이치, 글렌 포웰, 라이언 구즈먼, 테일러 후츨린

개봉 2016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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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박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