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혁신, 혹은 적폐? 뭐 그런 류의 단어들이 언론이나 각종 매체, 좀 확대해보자면 사회 전반에서 자주 쓰이는 이유는 뭘까요? 근본적으로 인간에게는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어떤 속성 같은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복잡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죠. 뭔가 바꾸고자 하는 것도 노력과 품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그렇게 뭔가 바꿔서 좋아지면 남의 이득이고 잘못 건드렸다가 잘못되면 내 책임 되기 십상이잖아요. 그냥 살아도 신경 쓸 일 천지인 현대인의 삶에 뭐 하러 추가적인 고민거리를 들고 오겠어요. 그게 나에게 이득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변화는 어떤 ‘사건’과 함께 찾아오곤 합니다. 이따금 기쁜 사건과 함께, 아주 대부분은 나쁜 일과 함께 말이죠. 버틸 때까지 버티다 나쁜 일이 턱 밑까지 다가와 목 바로 앞에서 칼날을 들이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나서야 변화를 시작하게, 혹은 변화가 시작되게 되고 또 대개는 그런 안 좋은 일과 함께 한 변화들이 인생을 보다 크게 바꾸곤 합니다.
개개인의 경우 그 나쁜 ‘사건’은 각자 제각각이겠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즈니스상의 나쁜 사건은 대개는 돈이죠. 영화도, 주류업계도 마찬가지일 텐데 큰 자본이 필요한 블록버스터 시리즈물의 경우는 아마 돈에, 즉 흥행에 더 많은 구애를 받곤 합니다. 큰돈 들여 만드는 영화에 만에 하나 실패할 위험을 등에 업고 실험적인 요소를 넣기란 정말 쉽지 않죠.
그래서 시리즈물의 경우 특히나 이전의 주인공을, 혹은 그 스타일을 답습하고 계승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또 역으로 그런 스타일을 바꾸면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영화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영화들 중 <007 스카이폴>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스카이폴>은 시작부터 이전 시리즈하고는 좀 달랐습니다. 007(다니엘 크레이그)과 요원 이브(나오미 해리스)는 M(주디 덴치)의 명령을 받고 MI6의 비밀 요원 명부를 탈취한 파트리스(올라 라파스)를 추적합니다.
이브는 멀리서 파트리스를 저격하려 하고 007은 기차로 도망간 파트리스를 추적해 갑니다. 007과 사투를 벌이는 파트리스를 발견한 이브는 파트리스를 저격하려 하지만 007과 파트리스가 뒤엉켜있어 사격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죠.
하지만 그런 상황을 보고받은 M은 일고의 망설임 없이 사격을 지시합니다. 망설이다 쏜 총알에 맞은 건 파트리스가 아닌 007이었고 007은 다리 아래 강으로 떨어져 사망(?)합니다.
<007> 영화가 007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셈이네요.
이렇게 요원 데이터를 가진 파트리스의 추적 임무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MI6의 비밀 요원 명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일부 요원들이 정체가 드러나 붙잡혀 처형당하고 거기에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라고 불리는 적에게 MI6 본부가 공격까지 받아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죠. 이로 인해 M도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퇴출 위기를 겪게 됩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이렇게 그냥 죽으면 영화가 성립될 리 있나요. 끈질기게 살아남은 007은 연인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전갈을 손등에 올리고 술을 마셔 가면서 휴식(?)을 취하다가 본부로 복귀해 M을 만나게 됩니다.
본부로 돌아온 007은 현장 임무 복귀에 적합한지를 판단하기 위한 테스트를 받습니다. M은 007이 테스트에 합격했다며 현장에 복귀시키지만 실제로 007은 체력테스트 등 모든 테스트에 불합격했죠.
그렇게 현장에 투입된 007은 007이라는 스파이 이미지에 참 잘 어울리는 장소인 마카오의 카지노로 향합니다. 거기서 실바의 부하인 세버린(베레니스 말로히)를 통해 실바에게 접근하게 되죠. 007은 Q(벤 위쇼)에게 받은 송신기를 사용해(?) 실바를 체포하지만 실바는 유유히 탈출해 M의 정치적 책임을 묻기 위한 청문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총격전을 벌인 실바와 007은 승부를 내지 못하는데요.
그 후 007은 자기가 가장 익숙한 장소인 고향 스코틀랜드의 집 스카이폴로 M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007과 M은 마지막 혈투를 벌이게 되죠. (결말은 굳이 안 적겠습니다만 뭐 뻔하겠죠?)
다른 <007> 영화처럼 이 영화에도 많은 술들이 나옵니다. 빠지면 서러울 보드카 쉐이킹 마티니도 나오구요.
특이하게도 맥주인 하이네켄도 나오고 시리즈 첫 개봉 후 50년 만에 개봉된 <007> 시리즈의 스카이폴을 기념하기 위한 맥캘런 50년이 등장합니다.
맥캘런은 일명 ‘위스키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싱글 몰트 위스키입니다. 전 세계 판매량으로야 글렌피딕이 더 많습니다만 국내의 인지도는 맥캘런이 조금 더 높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위스키답게 피트 향이 거의 없는, 입안에서 아주 부드럽고 찐득하게 넘어가는 맛으로 유명합니다.
스카치 위스키는 보통 생산 지역에 따라 분류하곤 하는데 맥캘런 증류소는 스페이사이드 지역에 위치합니다. 원래는 쉐리 캐스크를 이용해 숙성한 위스키로 유명한 증류소였지만 최근에는 쉐리캐스크를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캐스크를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선 총 3곳에서 등장했는데요. 워낙 보틀 정면을 잘 보여주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영화 초반 007이 숨어 지낼 때 바에서 맥캘런 파인오크 시리즈를 마시는 것으로 보이고 그 후 M을 찾아갔을 땐 일반 정규품 쉐리캐스크 보틀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후 쉐버린과 실바를 찾아갔을 때 실바가 바로 이 보틀을 007에게 대접합니다. 맥캘런 파인 앤 레어 1962를요.
잠깐 언급했지만 1962년은 <007>의 첫 시리즈 <007 살인번호>(Dr. No)가 만들어진 해입니다. 그래서 이 보틀을 준비한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참고로 같은 보틀이 소더비 경매에서 약 2천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마 다들 공감하실 텐데, 스카이폴은 여러 의미로 예전 <007> 시리즈하고는 좀 다른 느낌을 줍니다. 능글능글하고 뭔가 약간 슈퍼맨스러운,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좀 동화적인? 그런 분위기의 예전 007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구르며 온몸에 피를 묻히는 007, 뭔가 약간 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007이죠.
위에서 말했듯 누구에게나 변화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 변화가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구요. 그래서 누가 되었든 ‘목에 칼이 들어오고 나서야’변화를 시도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카이폴>도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점진적으로 몰락해가던 프랜차이즈 시리즈로서의 007, 거기에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본 시리즈의 역대급 흥행, 그런 분위기에서 007의 변화는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의 스카이폴이 만들어질 수 있었죠. 그리고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스카이폴>은 007시리즈 최초로 10억 불이 넘는 흥행을 기록했죠.
맥캘런도 마찬가지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오래 사용해 온 쉐리캐스크는 위스키 업계에서 점점 수요가 증가되는 상황이었지만 정작 그 캐스크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쉐리와인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면서 쉐리 캐스크 생산량이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쉐리캐스크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고 심지어 돈을 주고도 못 구하는 상황이 오게 되죠.
쉐리캐스크라는 아이덴티티를 두고 고민했던 맥캘런은 결국 결단을 내립니다. 쉐리캐스크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종다양한 캐스크들을 사용해 위스키를 생산하기 시작하게 되죠. 이는 위스키 소비량 증가라는 외부적 요인과 맞물려 맥캘런 증류소에 큰 자본적 성과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맥캘런 증류소는 최근 크게 증설을 했다고 하네요.
사실 <007스카이폴> 같은 경우 현실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티는 나지만 좀 어설퍼서 곳곳에서 구멍이 보이기도 했고 최근 맥캘런도 생산량을 늘이다 보니 예전과 비교하면 맛이 많이 변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호불호는 많이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비즈니스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결과가 증명하니까요.
솔직히 저도 조금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겠죠. :)
- 007 스카이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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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샘 멘데스
출연 랄프 파인즈, 다니엘 크레이그, 하비에르 바르뎀, 주디 덴치
개봉 2012 영국, 미국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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