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널>을 보면서 왜 하필 알 수 없는 재난이 이뤄지는 장소가 터널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감독님한테 물어보면 될 것을.) 그거야 뭐, 원작 소설의 배경이 터널이었으니까 그랬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한 편의 영화 속에서 터널이란 공간이 등장한다는 것이, 그리고 심지어 그 공간이 무너진다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원래 이런 잡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영화 속 터널이란 공간은 어떤 곳일까. 터널은 영화 안에서 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며, 혹은 어떤 의미로 묘사되곤 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터널하면 액션이죠.
저는 일단 터널이 등장하는 영화 속 액션 장면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먼저 해저터널이 배경인 영화죠.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재난 영화 <데이라잇>에서 터널 안에 갇힌 생존자들이 빠져나가기 위해 고생하던 장면들이 기억납니다. 또 다른 영화로는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에서 터널을 지나는 기차 위의 이단 헌트를 헬기 탄 장 르노가 위협하던 장면도 생각나더군요. 물론 시카고 한복판 터널에서 무지막지한 액션을 벌이는 <다크나이트>의 한 장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터널하면 허우샤오시엔이죠.
씨네필에게는 영화 속 터널 하면 바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떠오를 겁니다. 특히 <연연풍진>의 첫 장면(그리고 그와 닮은 <남국재견>의 장면 등등)은 많은 영화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장면이지요. <카페 뤼미에르>의 마지막 장면, 터널을 빠져 나온 기차들이 교차하던 그 마법같은 장면은 또 어떻구요. 모르는 분들 많을 것 같아 이만 줄임
한국영화 속 터널은?
아무튼 이런 영화 속 터널이란 공간에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는 한국영화 안에서도 터널이 종종 등장하고, 또 나름의 의미도 전달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영화가 있는지 한번 떠올려 볼까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우선 김성수 감독의 <비트>가 있죠. 로미(고소영)의 노예팅남 민(정우성)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합니다. 주로 밤에 달리고, 헬맷도 안 쓰고 가끔 사진에서처럼 손도 놓고 탑니다. 자전거인줄... 아무튼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영화 속 터널이란 공간은 자신의 삶의 특정 시기를 뜻하는 공간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청춘의 상징처럼 말이죠.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게 되는, 뭐 그런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겠죠.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외화도 있습니다. 바로, <월플라워>의 터널 장면이 딱 그렇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도 떠오르네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터널을 막 빠져나온 기차가 등장하죠. 영화에서 철도를 달리는 기차 장면은 주인공 영호(설경구)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죠. 주인공 영호는 터널 앞에 서서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데요, 그에게도 터널이란 공간은 어둡고 축축했던 과거를 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길고 긴 터널을 막상 빠져나왔는데도 세상은 그리 밝지만은 않더라는, 씁쓸한 뉘앙스가 느껴졌습니다.
터널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영화는 아무래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아닐까 합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 중에서 봉준호 감독은 마지막 장면의 터널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터널과 관련해서는 제작 비하인드도 재미있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찍기 앞서 시나리오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설정도 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촬영을 시작한 뒤에도 마지막 장면을 어디서 찍을지 정해놓지 않고 있었는데 당시 '백ㅇㅇ'이란 스탭이 경남 사천 비행장 옆 터널에서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내왔다지요. 봉준호 감독이 그 사진을 보자마자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가 터널에 주목한 것은 이 공간이 빛과 어둠의 경계가 되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터널이 시대적, 시간적 느낌을 주기도 하더라고요. 시나 소설에서 하나의 시대를 관통할 때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영화에서는 어두운 터널을 바라보고 서 있는 두 형사의 모습으로 80년대의 사건을 마무리지으면셔 2003년 현재로 넘어오게 돼요.
한 시대의 느낌을 터널이 부여해준 거죠." -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에서도 시대를 관통하는 느낌을 주는 터널이란 공간을 재미있게 사용했죠. <살인의 추억>과 연결지어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암울한 미래의 축소판과도 같은 설국열차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꼬리칸 사람들의 몸부림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둡고 축축하고 암울한 터널을 뚫고 지나가는 열차의 움직임, 혹은 방향을 닮아 있다고 말이죠. 어쨌든 뭐든 뚫고 지나가야 또 새로운 게 나올 수 있다는 거라는 의미라면, 한 감독의 영화 속 공간의 의미를 이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국열차>에서 실제 터널이란 공간이 활용되는 방식은 재미있는 액션 장면에서입니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김성훈 감독의 <터널> 속 공간에 의미를 부여해본다면, 또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네요.
영화에서 무너져내린 하도터널의 모습은 어떻게든 누구든 뚫고 지나가야 하는, 시대를 관통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게 몽땅 무너져내려서 누군가 혹은 우리가 터널 안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어떤 네티즌이 왜 터널 이름이 '하도'인가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리뷰가 재미있었습니다. '하도 하도' 무너져서 하도터널이라고 하더군요;;;
재미있는 건 <부산행>의 마지막 장면에도 터널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정말 딱 이런 의미로 쓰이지 않았나 싶지요. '상처를 통과하기 위한 터널', '새로운 삶이 시작될 터널'이란 뜻으로 말이죠.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최근 영화들에서 잇달아 터널이란 공간을 볼 수 있기에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터널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며, 과연 그 터널이 무너져내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럼 우린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요?
P.S.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서도 터널과 구조가 비슷한, 터널 같은 터널이 하나 나옵니다. 주란(박보영)과 연덕(박소담)이 몰래 학교를 빠져나올 때 배수구라고 하기엔 좀 큰, 터널이라고 하기엔 좀 작은 곳을 둘이 손잡고 깔깔 웃으며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 산 속 연못가에 놀러가죠. 이 영화의 주란의 마지막 대사, "이제 우리, 집에 가자"는 소원은 언제 이뤄질 수 있을까요? 이처럼 한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들이 영화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는 아마도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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