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각 매체마다 쏟아진 '2018년 베스트 영화 목록'을 보며, 미처 못 보고 지나친 영화들을 기록해 두었다. 한편으로는 내 나름의 결산을 위해 올해 어떤 영화들을 봤는지 살폈다. 뭐니 뭐니 해도 영화는 극장 관람이 최고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를 다운로드 혹은 스트리밍 해 보았던 방구석 영화관에서 건진 보물들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이번 뒹굴뒹굴 VOD에서는 2018년 기자의 방구석 영화관을 풍요롭게 만들어줬던 사사로운 리스트 5편을 준비했다.


다가오는 것들

L'avenir, 2016

감독 미아 한센-러브

출연 이자벨 위페르, 에디뜨 스꼽, 로만 코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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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명배우 이자벨 위페르. 그녀의 연기, 그녀의 영화는 언제나 기다란 여운을 동반한다. '타인을 이해하기란 가능한 일인가'라고 노트에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 순간부터, 영화는 온갖 흥미로운 주제를 툭툭 던진다. 철학 교사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여러 의미에서 변곡점에 서 있다. 불안증에 시달리는 어머니(에디뜨 스꼽)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찾고, 영원한 사랑이라 믿었던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에게선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들>의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굵직한 사건보다도 나탈리가 중년의 나이에 겪는 내면의 미묘한 변화에 있다. 수업 시간, 급진적인 사상가의 이론을 들려주는 나탈리는 정작 교문 앞의 학생 시위대가 성가시고, 그녀의 가르침에 감화됐던 제자 파비앙(로만 코린카)을 따라 찾아간 대안 공동체에선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녀를 '모순'이라는 간단한 말로 눙칠 수는 없다. <다가오는 것들>은 그만큼 간접적이고도 상세한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한다.


그녀에게

Hable Con Ella, 2002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하비에 카마라, 다리오 그란디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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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특별전이 VOD를 통해 공개됐다. 덕분에 그의 남은 필모그래피를 적당히 훑어볼 수 있었다. 인간의 욕망을 기점으로 풀어낸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일단 지루할 틈이 없다. 저널리스트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는 투우사 애인 리디아(로자리오 플로레스)가 부상을 당해 혼수상태가 되자 기약 없는 그녀를 사랑할 자신을 잃는다. 그때 그는 다른 병실에서 혼수상태의 여자를 정성껏 돌보는 간병인을 보게 된다. 베니뇨(하비에 카마라)라는 이름의 간병인은 혼수상태의 알리샤(레오노르 와틀링)를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대하며 대화를 나누고, 손톱 관리에 전신 마사지까지 지극정성을 다하는데. 마르코에게 신뢰를 느낀 베니뇨는 알리샤와의 관계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충격을 거듭하는 <그녀에게>의 서사는 다분히 논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끝내 관객을 '판단'이 아닌 '혼란'의 경지에 데려다 놓는 감독의 재능을 부정하기란 힘들다.


행복한 사전

舟を編む, 2013

감독 이시이 유야

출연 마츠다 류헤이,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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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편의 영화로 인해 마츠다 류헤이를 날티나는 캐릭터에 최적화된 배우라고 여겼다. 하지만 <행복한 사전>의 마지메(마츠다 류헤이)는 완벽하게 내가 그렸던 이미지의 정반대 편에서 온 캐릭터였다. 어떡하다 출판사 영업부에 왔을까 싶을 정도로 숫기 없는 소심한 직원 마지메. 어느 날 사전 편찬부에 공석이 생기고 적임자를 찾던 아라키(코바야시 카오루)가 그에게 '오른쪽'의 정의를 묻는다. 난감한 질문이다. 오른쪽이 오른쪽이지 오른쪽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언어학을 전공한 마지메는 생각에 잠겼다가 모기만 한 소리로 답한다. "서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북쪽에 해당하는 곳.. 아, 그리고 보수적 사상에도 오른쪽이라는 말을 쓰고.." 그렇게 존재감 없던 그는 대사전 편찬 프로젝트의 멤버로 발탁되어 인고의 여정을 밟아 나간다. 낱말도 세월의 때를 타는지라 사전 만들기에 공들인 세월만큼 수정해야 할 일도 함께 는다. 더구나 수요가 많지 않은 사전, 회사는 이 부서에 관심도 없다. 무관심 속에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단순 명료한 철학 하나로 장장 15년을 버틴 이들의 장인정신에 괜스레 경건한 마음이 되던 그런 영화였다.


래리 플린트

The People Vs. Larry Flynt, 1996

감독 밀로스 포만

출연 우디 해럴슨, 코트니 러브, 에드워드 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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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영화계 큰 별들이 지던 한 해였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 밀로스 포만은 지난해 4월,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소박한 추모의 의미로 그의 영화를 고르던 중 <래리 플린트>가 눈에 띄었다. 사실 추모의 목적으로 선택하기엔 조금 유별난 실화 바탕의 영화다. 스트립 바를 운영하던 래리(우디 해럴슨)가 가게를 홍보할 목적으로 포르노 잡지 '허슬러'를 발간하고, 이 잡지는 훗날 '플레이보이'의 아성을 위협하는 성인 잡지가 된다. 파격의 수준을 넘어 당대의 터부를 죄다 건드린 '허슬러' 였기에 래리는 늘 논란의 대상이었고 사회의 악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법정 사건으로 미국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오늘날 언론이 다소 과격한 만평을 그리더라도 명예훼손의 소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이 기념비적인 사건이 수호한 자유의 가치 덕택이다. 특히 언론 종사자, 언론 학도라면 필람을 권하는 작품.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lity, 2000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

출연 존 쿠삭, 잭 블랙, 이븐 야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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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쿠삭의 진지한 표정과 코미디가 만나면 왠지 독특한 분위기가 된다. 음악광 롭 고든(존 쿠삭)은 덕업 일치를 이룬 레코드 가게 사장이다. 30대 미혼 남성인 그에겐 오랫동안 만나 온 여자친구 로라(이븐 야일리)가 있지만, 그녀는 어느 날 불현듯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 버렸다. 이때 롭은 카메라를 쳐다보고 손수 내레이션을 날린다. "지금까지 헤어진 여자 톱 5 순위를 매겨볼까!" 자신을 울린 다섯 명의 여자를 떠올린 롭의 이야기는 지독하게 솔직하고, 솔직해서 더 깔깔 웃게 된다. 내 모든 연애담은 초판의 변형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실패한 연애사는 꼭 그녀와 함께 기억되는 음악과 뮤지션의 이름이 포함된다. 과연 음덕 다운 화법이다. 그렇게 과거 연인들을 곱씹어 본 롭은 다시 '내가 차인 이유'에 대해 골몰하다가, 직접 연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존 쿠삭의 매력부터 사운드 트랙에 실린 밥 딜런, 벨벳 언더그라운드, 스티비 원더 등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 선곡까지. 음악광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씨네플레이 심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