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미션>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연기가 담긴 작품이다. 87세의 나이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약을 운반하다가 구속된 실존인물 레오 샤프의 일화를 88세의 이스트우드의 존재로 구현했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위대한 활약상을 9개의 캐릭터로 돌이켜봤다.
이름 없는 남자
<황야의 무법자>
A Fistful of Dollars, 1964
이탈리아 출신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황야의 무법자>(1964)로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작을 알렸다. 주인공으로 낙점된 배우는 영화계에선 영 낯선, 30대 중반 즈음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무기력함이야말로 서부극의 영웅상이라고 여기던 레오네는, 피로와 체념이 가득한 이스트우드의 얼굴에서 존 웨인이나 헨리 폰다를 위시한 서부극 스타에서 보지 못한 힘을 발견했다.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이름 없는 사내는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철저히 제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 총구를 겨눌 뿐이다. 잔뜩 찡그린 채 시가를 물고 있는 모습은 서부극 히어로의 영원한 표상으로 남았다.
해리 캘러핸
<더티 해리>
Dirty Harry, 1971
세르지오 레오네와 함께 이스트우드가 스승으로 여기던 돈 시겔이 연출한 <더티 해리>의 주인공 해리 캘러핸 역시 '정의'와 거리가 멀다. 고생 끝에 연쇄살인범을 체포하지만 부패한 상관의 지시로 범인은 석방되고 해리가 되려 고문죄로 고소된다. 공권력을 잃은 경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혼자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해리는 악당보다 더욱 악랄하게 범인과 쫓고 끝내 주검으로 만들고야 만다. M29 리볼버를 든 수려한 자태가 무색할 만큼 해리는 그저 비참해 보인다. 이스트우드의 건조한 얼굴에서도 절망이 엿보일 때, 그늘진 기운은 배가 된다.
데이브 가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Play Misty for Me, 1971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첫 연출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서 주연 배우로도 활약했다. 같은 노래만 신청하던 골수 팬과 잠시 재미를 봤다가 광적인 집착에 위협 받게 되는 바람둥이 라디오 DJ 데이브 역이다. 데이브는 무력하다. 공격적으로 옥죄어 오는 에블린(제시카 월터)의 마수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겁에 질려 한다. 외로워 보일지언정 결코 무릎 꿇을 것 같지는 않았던 이전의 캐릭터와 전혀 다른 기세의 이스트우드를 만날 수 있다. 같은 해 개봉한 <매혹당한 사람들>(1971)에서도 비슷한 처지의 사내를 연기했다. 이스트우드가 구현하려던 마초성이 상당히 다층적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는 행보다.
레드 스토벨
<고독한 방랑자>
Honkytonk Man, 1982
재즈와 블루스에 관한 조예가 상당히 깊은 걸로 알려진 이스트우드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음악영화는 좀체 등장하지 않았다. 감독 데뷔 11년 만에 처음 연출한 음악영화 <고독한 방랑자>는 이스트우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음악가를 연기한 작품이다. 나이 어린 조카와 함께 허름한 술집을 전전하는 무명의 컨트리 가수 레드가 주인공이다. 아들 카일 이스트우드와 함께 호흡을 맞춘 영화여서일까. 결코 녹록한 삶은 아니지만, 이렇게 능글맞은 이스트우드의 캐릭터를 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레드의 태도는 한껏 가볍다. 미련하게 꿈만 쫓던 그가 죽음을 앞두고 기타를 치며 투박한 노래를 선보이는 모습이 눈물겹다.
윌리엄 머니
<용서 받지 못한 자>
Unforgiven, 1992
과거 극악무도한 도둑이었지만 가정을 꾸려 손 씻고 평범하게 살고 있던 윌리엄 머니는 아내를 잃은 홀아비 신세에 키우던 돼지까지 병들게 되자 다시금 총을 든다. 현상금을 쫓아 다시 폭력의 길로 들어섰고 고생 끝에 돈도 손에 쥐게 되지만, 그 사이 그는 너무 많은 걸 잃었다는 걸 깨닫는다. 후회하고 반성해도 결국 용서 받지 못한 자가 된다. 환갑을 넘긴 이스트우드는 '이름 없는 남자' 3부작, <무법자 조시 웨일즈>(1976), <페일 라이더>(1985) 등 지금껏 자신이 쌓아온 총잡이의 신화적 이미지를 무너트려, 노쇠하는 신화에 대한 공포를 자백한다. 무적에 가까운 전투력을 지녔지만 완전히 텅빈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폭력의 초상을 이스트우드는 낡은 육체로 증명해냈다.
로버트 킨케이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 1995
이스트우드가 거쳐온 캐릭터는 남성적인 매력을 감추지 않았지만, 그게 사랑하는 사람를 위한 구실로 기우는 법이 없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다르다. 절제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스트우드의 영화인 만큼 손쉬운 말과 행동을 늘어놓진 않되, 사랑으로 요동치는 중년의 마음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드러내는 데에 매진한다. 카메라 앞에서 메릴 스트립과 함께 선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로버트 역시 충만한 사랑의 기운을 마음껏 내비친다. 흥미로운 건 이 로맨스가 클라이막스에 달하는 순간 이스트우드의 행색이 더없이 초라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확실한 감정"을 일깨워준 저 여인이 자신에게 와주기를 바라는 남자의 간절한 마음이 마치 저리도 처량해 보여야 가능한 것일까? 중얼거리게 된다.
프랭키 던
<밀리언 달러 베이비>
Million Dollar Baby, 2004
2000년대 들어 이스트우드는 노인의 모습이 완연해진 스스로에게, 완벽하지 못한 보호자의 인격을 부여했다. 만나지 못하는 딸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은 받지 못하는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는, 끈질기게 제자로 받아달라는 31살의 아마추어 매기(힐러리 스웽크)에게 결국 마음을 연다. 하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성공담이 아니다. 매기를 향한 프랭키의 부성애는 그녀가 전신마비 신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자따윈 선수로 받지 않는다며 매몰차게 등돌리던 프랭키는 가족보다 더 매기를 아끼고, 납득할 수 있지만 차마 행동에 옮기기 불가능한 매기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모쿠슈라'에게 마음을 쏟는 백발의 이스트우드에게서 정의를 뛰어넘는 헌신의 경지를 보았다.
월트 코왈스키
<그랜 토리노>
Gran Torino, 2008
한국전쟁 참전용사 코왈스키 역시 피붙이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똥고집은 기본, 언짢으면 바로 얼굴을 구기며 그르렁 소리를 내고, 여차 하면 장총도 겨눌 성질머리의 노인네. 하지만 그런 코왈스키 역시 누군가를 보호하는 운명에 처한다. 옆집에 사는 동양인 이민자 가족이다. 지독한 인종주의자인 그는 아끼는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 한 타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기로 마음먹는다. 사막 따위 없는 한적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 현대물이고, 그의 육체는 노화가 완연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걸 위해 폭력을 선택했던 예의 총잡이가 떠오른다. 그러나 최선의 평화를 찾는다. 생애에 걸쳐 제 육신을 통해 서부극 영웅상을 변주해온 '배우' 이스트우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경이로운 결단이다.
얼 스톤
<라스트 미션>
The Mule, 2018
평생을 꽃과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얼 스톤은 처음 보는 유형의 이스트우드 캐릭터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 가족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면? 그럼 얘기가 좀 달라진다. 87세의 나이로 거액의 마약 운반책으로 활동한 실존인물을 그리는 데에 무엇보다 중요한 키워드는 가족이다. 빈털터리가 된 얼은 돈을 위해 물건을 실어나르고, 벌이가 쏠쏠해지자 그 돈을 가족에게 쓴다. 언제부턴가 점점 실존인물을 영화화 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온 이스트우드는, 배우로 활약하는 마지막 영화에서 처음 실존인물을 연기한다. 마약을 운반하는 과정에 얽힌 서스펜스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영화는 오로지 가족과의 화해를 향해 달려간다. 60년을 훌쩍 넘긴 커리어 끝에 이제 카메라 앞에서 물러서는 이 위대한 무비스타가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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