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색의 제국
수많은 유럽 국민국가들(nations)의 국기에 새겨진 파란색, 흰색, 빨간색, 이 세 가지 색깔이 이전에 어디서 유래했고 무엇을 상징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가 습격당한 다음 날(7월 15일), 국민군 총사령관 라파예트가 시민들에게 저 세 가지 색으로 된 모자를 나누어 준 이후로, 삼색이 상징하는 바는 굳어졌다. 자유(파란색), 평등(흰색), 우애(빨간색, ‘박애’라고 쓰지 않는 것은 그들의 박애가 고작해야 부르주아들의 우애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유럽은 이 세 가지 정신 위에 세워졌다. 그러니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난해한(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평이하다고 해야 할)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는 유럽에 관한 영화다. 정확히 말해, 삼색에 녹색이 더해진 네 가지 색채로 대처리즘(Thatcherism. 영국식 신자유주의)이 기승을 부리던 1989년 즈음의 유럽을 (말할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다룬 영화다.
식당 Hollandise
영화의 무대는 ‘홀란다이스’란 이름의 특급 식당. 아마도 캘빈주의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도 아주 이른 시기에 진보적 시민 계급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었던 나라(이른바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 ‘홀란드’와, ‘파라다이스’의 합성어로 보이는 저 이름의 식당은, 정말로 ‘연극 무대’처럼 세팅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마치 연극이 시작할 때 그러하듯 두 명의 배우가 커다란 막을 양쪽으로 젖혀 시야를 튼다(그리너웨이는 <마콘의 아이>에서도 연극 장르를 오마주한 적이 있다). 일종의 소격효과인데, 관객들은 이제부터 이 영화를 현실주의의 환영 속에서 볼 수 없다. 막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연극’처럼 감상되어야 하고, 따라서 관객들은 거리감을 둔 채 그것을 해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화가이기도 했던 이 감독의 미장센은 너무도 완벽해서 관객은 그 무대를 현실과 동일시하는 일을 애초부터 포기해야 한다. 의상도 조명도 가구도 벽에 걸린 그림도 배우들의 동선과 동작도 철저하게 계산(안무)되어 있는 화면들의 유려한 연속, 카메라는 주로 느리게 수평 이동하는 팬 숏으로 그 무대를 비추는데, 그럴 때 매 장면은 마치 조각조각 뜯어보아야 할 회화(특히 그리너웨이가 좋아했던 렘브란트 시절의 네덜란드 회화) 작품에 육박한다.
썩은 자유
자, 그렇다면 해석해야 할 기호들이 가득한 이 식당은 이름 그대로 ‘시민 계급이 오래 꿈꿔온 낙원’인가? 먼저 외부에서 식당으로 들어서는 입구 역할을 하는 도로와 주차장, 조명은 그곳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이곳엔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와 반대인데, 그 자유의 조명 아래서 푸른 휘장을 두른 알버트(도둑)는 자신의 직원을 린치하고, 유기된 개들은 썩은 고기를 찾아 어슬렁거리고, 도둑의 아내(조지아)는 남편에게 폭행당하고, 아름다운 성가를 부르던 소년(천사의 이미지다)은 거세당한다. 그곳에 세워져 있던 트럭에서 부패한 채 발견되는 식재료들의 기괴한 풍경은 그곳이 부패와 빈곤과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파란 자유는 썩었다.
폭행당하는 우애
주차장을 지나 녹색 조명으로 물든 주방(삼색에는 없었으니 이 공간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하자)을 거치면 식당의 홀에 이른다. 온통 붉은 조명과 의상, 가구와 양탄자들, 장신구와 식탁보들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다. 심지어 (낯설게도) 이곳에 들어서면 아무런 설명 없이 도둑들이 어깨에 두른 휘장 색도 붉은색으로 바뀌고 조지나의 드레스(그 유명한 장 폴 고티에가 디자인했다)도 붉은 옷으로 바뀐다. 음에도 색이 있는 법이니 이 공간에서는 음악(마이클 니만)도 붉다. 그러나 도둑들에게 우애란 게 있을 리가. 알버트의 온갖 욕설(인종주의와 여성혐오 발언)은 말할 것도 없고, 성추행, 동료 폭행, 심지어 알버트가 패트리샤의 얼굴에 포크를 쑤셔 박기도 하는 곳이 이 공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 내내 중요한 알레고리로 등장하는 홀 벽의 그림이다. 도둑들과 여인들이 천박하고 게걸스러운 식사를 하는 장면이 포착될 때마다, 프레임 배면에는 그림 한 장이 등장한다. 그림의 정체는 인물화(특히 집단 인물화)로 유명했던 17세기 네덜란드 회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성 조지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Banquet of the officers of the St. George Civic Guard Company, 1614년)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를 독립된 국민국가로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시민들이, 민병대 군복무를 마치고 연회를 벌이는 장면을 실제 모델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저와 같은 절묘한 프레임 배치를 통해 그리너웨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분명한 듯하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그 건전했던 시민 계급이 1989년 즈음의 영국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보라. 무소불위의 권력과 폭력과 사기와 추행. 붉은 우애는 폭행당했다.
배변의 평등
그 붉은 식당 한편의 식탁에는 매번 한 신사(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는 유대인이다)가 앉아 식사를 한다. 그는 점잖고 지적이어서 먹는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조지나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 그의 이름은 마이클. 붉은 홀에서는 독재자 알버트가 날뛰고 있으니 그들은 만인이 두루 평등하다는(누구나 다 싸고 사니까) 화장실에서 밀애를 나눈다. 물론 화장실은 온통 하얀색이고, 거기 들어오는 이들의 의상도 모두 희다. 알버트마저 거기 들어올 때는 휘장의 색이 하얗게 변해 있다. 그러나 알버트의 폭력은 거기에도 미친다. 자꾸 자리를 비우는 조지나를 찾아 폭행하고, 소변을 보고 있는 사내들의 멱살을 잡고, 심지어 여자 화장실 문을 아무렇게나 열고 부수며 소리 지르는 알버트. 하얀 평등은 대소변에마저 적용되지 않는다.
녹색의 주인
그리너웨이가 보기에 대처 시대(1979~1990)의 유럽은 애초에 ‘문명화된 서구’가 이상으로 삼았던 자유와 평등과 우애의 정신 모두를 저버린 세계였던 모양이다. 그가 탁월한 형식주의 감독인 것은 그와 같은 정치적 증오와 경멸을 섬세한 색채감과 미장센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할 만큼 영화적 기법에 능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색이 더 남아 있다. 앞서 지나쳤던 바로 그 녹색의 주방이다.
주방은 지배인 리처드(요리사)가 통치한다. 아니 통치한다기보다는 보호한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가 부하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법은 없다. 게다가 그곳에는 예의 그 천사 같은 아이가 부르는 성가 소리가 하루 종일 가느다랗고 아름답게 울려 퍼지고 있으며, 화장실에서 쫓겨 온 마이클과 조지나가 음식들 사이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주방의 모든 직원(대체로 서구 문명에 대해서는 타자인 유색인종들이다)이 기꺼이 그들의 후원자이자 비호자가 된다. 먹을 것이 만들어지고 사랑이 보호받는 곳, 천사가 성가를 부르고 품위가 폭력을 제압하는 곳, 노예들의 녹색은 평화의 색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저 노예이기만 할까? 감독은 아마도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해 알았던 듯한데, 헤겔에 따를 때, 노예의 인정이 없는 주인은 주인으로 남을 수 없다. 그리고 노동을 통해 사물들을 향유하는 것은 정작 주인이 아니라 노예들이다. 천박한 미각을 가진 주인과 기품 있는 요리를 만드는 노예, 주인과 노예의 인정을 둘러싼 투쟁은 그런 이유로 역전되기 쉽다(이 영화의 제목 맨 앞에 ‘도둑’이 아닌 ‘요리사’를 먼저 거명한 것도 그런 이유는 아니었을지). 식당에서 유일하게 알버트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사람 리처드가 이제 무엇을 하는지 보자.
그를 먹어라
조지나와의 관계가 들통 난 유대인 마이클이 그의 오래된 서가에서 알버트의 손에 죽는다. 그 사이 둘에게 음식을 날라주던 천사 같은 소년도 거세당한다. 그 장면들은 너무도 잔인해서 한국에 개봉될 때 삭제되었다. 조지나가 발견한 알버트의 시신, 그의 입속에 잔뜩 구겨 넣어져 있는 것은 어떤 책에서 찢어낸 책장이다. 무심코 지나친 관객들이 많겠지만 그 책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프랑스 혁명”.
연적을 죽이고 의기양양해진 알버트가 식당에서 주절거리는 말들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그놈이 뭐래, 그 혁명 책이 맛있대? 나폴레옹은 미식가였다. 특히 굴 요릴 좋아했지. 놀랍지 않아? 처칠도 그랬고 모든 장군은 해물광이었지. 시저는? 히틀러는 조개를 즐겨 먹었지. 무솔리니는 낙지광이었고.” 나폴레옹과 히틀러와 무솔리니, 그렇다면 저 대사를 통해 그리너웨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 프랑스 혁명의 세 가지 정신은 최종적으로 유대인 학살에서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라고 이해하더라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색채의 상징성 속에 깊이 숨겨져 있었다지만, 이 영화는 실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러나저러나 저 도둑을 어찌해야 할까? 저 천박하고 품위 없고 폭력적인 (실은 성적으로도 불능인) 도둑은 이제 주인으로서 인정받기를 포기한 자이니까. 영화는 급기야 그 말 많은 마지막 장면을 준비한다. 녹색 주방에서의 길고 아름다운 롱테이크가 조지나의 비탄을 충분히 강조한 후, 그녀와 리처드의 복수가 시작된다.
어떤 영화에는 제아무리 끔찍하더라도 삭제되어서는 안 되는 장면이 있는 법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한국 개봉 시 삭제된 결말부 10분여의 장면에서, 식당은 녹색의 노예들에 의해 점령당한다. 도둑 일당들은 제압되고 알버트는 강제로 (리처드와 조지나가 함께 요리한) 마이클을 먹어야 한다. 리처드의 손에서 소년의 손을 거쳤다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권총을 들고 조지나가 명령한다. “그를 먹어라.” 멈칫거리던 알버트가 구토를 참으며 시신 요리를 먹기 시작할 때 한 발의 총성이 울리면 영화는 끝난다.
혹자들은 이 장면의 역겨움에 악담을 퍼붓기도 하고, 혹자들은 세계 영화사 중 가장 불편한 장면 중 하나라고 평하기도 한다. 나로서는 입장이 다르다. <토템과 타부>에서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 있다시피, 실은 우리 모두 식인종의 후손이고, 인류는 무수한 식인 제의를 통해 문명을 수립한 적이 있으니까. 폭군 아버지를 나누어 먹은 아들들이 문명의 설립자였다고 프로이트는 (그리고 지라르도 프레이저도) 말한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고 보면 많은 이들이 아직도 한 성자의 피와 살을 일주일마다 먹고 마신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 글에서보다는 다른 영화에 대한 글에서 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그 영화는 내가 아는 한 전쟁 영화의 최고 걸작, (다음 글에서 다루게 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1998)이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