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지안과 같은 얼굴로, 말을 고르고 고르다 속으로 삼키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 않나. 학교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때로는, 거울 속에서.
가끔 그런 캐릭터들이 있다. 본 지 너무 오래 되어 상세 줄거리도 가물가물한 작품인데, 유난히 혼자 선명하게 떠올라서는 “나를 잊으면 안 된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캐릭터. 김남길이 아직 ‘이한’이라는 예명을 쓰던 시절 분했던 KBS <굿바이 솔로> 속 유지안도 그런 캐릭터다.
일곱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상처와 비밀, 콤플렉스를 안고 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굿바이 솔로>에서 누구 하나 마음 주고 싶지 않은 캐릭터가 없지만, 그 중에서도 지안은 유달리 아픈 손가락이었다. 지안은 부족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람이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점잖고 우아한 부모님 아래서 그늘 없이 자랐고, 지금은 친구 민호(천정명)네 아버지의 건설회사에서 일하며 민호 아버지(장용)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엘리트다. 곁에는 사랑하는 연인 수희(윤소이)가 있고, 두 사람이 함께 할 미래만 꾸리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겉으로 보여주는 것만 보면 그렇다.
행복해야 하는 사람인데, 지안은 행복하지 않다. 사랑하는 수희에게 말하고 싶어도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이 있어서다. 네가 본 부모님 사진은 내 부모님이 아니라고. 사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고, 자신을 뺀 가족들은 다 언어장애가 있으며, 아직 어린 조카 또한 병이 있다고. 그 병구완하느라 내가 번 돈에 사채까지 더 해 집까지 넘어가게 생겼는데, 차마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고. 처음엔 콤플렉스 때문에 숨겼고, 거짓을 말하다 보니 점점 자라서 쉽게 고백할 수 없는 크기의 거짓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너라도 살려면 철저하게 숨겨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려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고. 너에게 진실할 수 없는 것이 너무 괴로운데, 진실해지는 건 또 너무 두렵다고. 지안은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썩어간다.
살면서 겪어온 고난과 콤플렉스를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칼럼으로 써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나지만, 지안이 무슨 마음인지는 알 것 같다. 동정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선 탓에 배려와 양해조차 동정으로 오해하고 거절하는 못난 자존심, 사랑하는 친구와 연인 앞에서 꿀릴 것 없이 대등한 사람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간절함,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들로 세상에 버림받고 사방에서 거절 당하는 일에 대한 공포 같은 게 아주 낯선 감정은 아니었으므로. 그 무거운 감정들을 잔뜩 떠메고 휘청거리는 지안이 하는 일은, 민호 아버지네 건설회사가 추진하는 도심 재개발 사업이다. 한때 자신과 부모님이 살던 집을 집어삼켰던, 철거반원들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던 치욕적인 기억이 서려 있는 사업을 지금은 지안이 하고 있다.
직접 제 삶의 거짓과 모순을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지안은, 수희의 핸드폰으로 발신자 번호를 감춘 익명의 문자들을 보낸다. (젊은 독자분들에겐 낯선 얘기겠지만, 스마트폰이 도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으로 발신자 번호를 지우고 문자를 보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연인의 실체는 사실 따로 있다는 암시를 담은 문자를 보내며, 지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진실이 부끄러웠을까, 아니면 그 진실을 직접 입으로 꺼내는 일이 부끄러웠을까. 어쩌면 그 진실을 자기 입으로 직접 고백할 용기도 내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이 제일 부끄럽지 않았을까.
참 비겁하고 마지막까지 이기적이었던 캐릭터인데, 제 아버지(주진모) 마음 편안한 모습 보고 싶다는 생각에 끝까지 수희와 결혼식을 올리는 쇼를 벌이며 주변 사람들 마음에 상채기를 남겨놓고 저 홀로 리비아 지사로 훌쩍 떠나버린 캐릭터인데, 이상하게 지안을 미워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게 거짓을 말하고 자신을 숨기고 주변을 해치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을 것이 지안 자신이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병들어 수척해진 새와 같은 얼굴로 슬피 웃던 지안을 보고 있노라면, 안으로만 꾹꾹 진실들을 눌러 담고 사는 게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어떤 진심은 속으로 누르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뭔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살다 보면 지안과 같은 얼굴로, 말을 고르고 고르다 속으로 삼키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 않나. 학교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때로는, 거울 속에서.
그래서 <굿바이 솔로>를 떠올릴 때마다 궁금해진다. 지금 지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픈 자기 과거와는 원만하게 화해했을까. 있어도 없는 양 숨기고 살았던 가족들과도 한 뼘쯤은 더 가까워졌을까. 훌쩍 떠나간 곳에서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예쁘다고 말해 줄 사람을 찾았을까. 자신이 상처 입혔던 친구들인 민호, 수희, 미리(김민희)와는 얽히고설킨 마음들을 풀어냈을까. 그런 자기 자신을, 마침내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까.
실존 인물도 아닌데 괜히 지안의 성장과 안녕을 바라는 내 마음은, 어쩌면 순수한 이기심인 건지 모른다. 지안처럼 슬프고 억눌린 사람도 오랫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콤플렉스와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유지안씨, 이제는 행복한가요? 그럴 수 있기를 빕니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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