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의 빌런 팀업 무비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남긴 거라곤 마고 로비의 할리퀸뿐이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할리퀸은 히어로무비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그녀의 이름과 의상, 스타일링을 기억할 만큼 센세이션이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커의 사이드킥이라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캐릭터인 할리퀸의 기원과 좀 더 내밀한 '개인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모두가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망치를 들고 미소 짓던 마고 로비는 기억하지만, '할린 퀸젤'이 어떤 사람이었고 왜 조커에게 빠져 빌런이 되고 말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할리 퀸젤(왼쪽)과 조커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한다기보다는 구체적으로 회자된 적이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세세하게 다루기 어려웠을 것이고, 조커와의 로맨스 그 이후를 다루는 데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 개봉한 스핀 오프 무비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도 기원에 대해 다뤄지지는 못했다. 조커와의 결별 이후 할리퀸이 어떻게 거듭나는가에 대한 내용이 주요한 스토리라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할리퀸은 첫 등장이 조커의 사이드킥 캐릭터(당시에는 엑스트라였다)로 시작한 만큼, 그녀의 이야기에서 조커의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고담 시의 흑막과 그림자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조커와 조금 거리를 두고, 할린 퀸젤이라는 이 엘리트 여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기원' 이야기를 하고 있는 코믹스가 있다. 올 초 발매된 <할린(HARLEEN)>이다.


<할린> 표지

할리퀸, 본명은 할린 프랜시스 퀸젤, 정신의학 박사이자 범죄자 심리상담 전문 상담사. 고담시의 한 연구소에서 연구를 이어가던 할린은 과거의 사건이 남긴 스캔들에 여전히 시달리며,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성과조차 과거사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암울한 상황에 휘말려 있다.

최초부터 기획을 통해 창작된 캐릭터가 아니었고, 조커의 사이드킥이 필요해서 만들어졌다가 인기를 끌면서 개인적인 이야기가 추가된 케이스이므로(물론, 히어로 코믹스에서 기원에 일정 정도의 변형이 가해지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할리퀸의 기원은 여러 번 변경되었고 서사의 주체도 조커에서 할리퀸으로 서서히 이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보다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와 흡사한 느낌의 이야기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할린 퀸젤이 조커를 만나게 되고 결국 범죄자가 되는 이야기다.

아캄에 갇힌 조커를 상담하다가 상담의가 조커에게 설득 혹은 회유당해 사랑에 빠지고, 결국 조커의 탈옥을 돕게 된다. 조커 기준에서 조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흔히 있는 일이다. 조커에게 윤리적 기준점이나 지켜야 할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리퀸 이전의 할린 퀸젤의 시선에서 보면 의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작중에서 할린 퀸젤 박사가 하고 있는 연구는 범죄자 심리 분석을 통해 실제로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 지점, 즉 공감 능력이 저하되는 원인을 분석하고 이런 저하 현상이 영구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선'을 넘지 않게끔 돕는 것이며, 이 단계를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것이 목표였다.

즉 할리퀸 이전의 할린 퀸젤은 범죄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범죄를 저지르는지에 대해 일반인 이상의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이들, 미스터 재즈와 포이즌 아이비 등 조커 외에도 상담을 진행 중이었고 이 사례 이외에도 연구는 충분히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알만큼 아는 사람이었고, 범죄자들의 심리 구조와 사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전문가'가 왜 조커에게 넘어가 버렸을까.


DC코믹스에서의 조커가 압도적인 빌런 캐릭터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조커는 최근에 덧입혀진 기원이나 피폐했던 가정사, 불안한 정신 상태 같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며 유능한 빌런 캐릭터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범죄자 심리 전문가인 할린 퀸젤이 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커에게 사로잡히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뜻이다.

코믹스 <할린>은 할린 퀸젤, 즉 할리퀸 이전의 할린의 독백으로 시작해 독백으로 끝난다. 즉 할린 퀸젤의 심리상태와 변화 과정이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서술되고 있으며, 조커를 만나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정의와 선의 앞에 시험당하는 과정까지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이렇게 할린 퀸젤이 할리퀸이 되기까지의 이 기이하고도 광기 어린 과정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들이기에 조금 더 흥미롭다.

거기에 조커의 모습도 독특하다. 우리는 조커가 진심이 아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코믹스에서의 조커는 철저히 할린의 눈을 통해 비친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진실된 부분인지는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조커는 정말로 할린 퀸젤, 즉 그의 '할리퀸'에게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설령 조커가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조커는 할리퀸을 도구로 이용하는 걸 주저하지 않으리라는걸..

빌런 캐릭터로서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기막힌 캐릭터, 단순히 그런 서사적 재미를 넘어서 조커는 이 코믹스에서... 심지어 괜찮은 남자처럼 보이는 순간까지 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워너브라더스가 기대했던 만큼의 호평을 받지 못하자 이후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화제가 되었던 부분인 조커와 할리퀸의 러브스토리를 테마로 한 스핀 오프 무비를 제작한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이 루머가 현실화되었다면 아마도 이 코믹스 <할린>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이들의 로맨스가 일반적인 사랑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조커의 감정과 할리의 감정이 동일하지도 않고, 오히려 공포심이 더 강하게 보이는 시점도 다수 있는 데다 관계의 프레임 자체가 빈말로라도 동등한 위치라고는 할 수 없다. 아무리 할린이 조커를 사랑한다 한들, 상대가 하필이면 조커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로맨스가 절대 순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나. 덕분에 이 코믹스는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느끼는 스토리적 예측의 재미는 없다. 할린 퀸젤은 할리퀸이 될 것이며 그 이후의 미래 역시 행복하지는 못할 게 확실하기에.

여기에 실제로 친한 사이가 된 포이즌 아이비와의 관계, 그리고 하비 덴트가 고담 시의 저명한 슈퍼 빌런 투페이스로 각성하는 순간, '배트맨' 브루스 웨인의 불살과 정의에 대한 고민 등 고담 시와 할리 퀸, 조커를 둘러싼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할린 퀸젤 박사가 어떤 고민에 직면해 있었는지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장점이라면 장점일 듯하다.

무엇보다도 할리 퀸의 기원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포인트이며, 조커와 할리 퀸의 관계를 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서서히 미쳐 가는 것 같은 할린 퀸젤 박사, 아니 할리 퀸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화제성을 끄는 데는 이래저래 성공했지만, 흥행과 평가 면에서 모두 좋은 반응을 얻는 데는 계속해서 한끗씩 어긋나고 있는 '할리 퀸'의 캐릭터에 뭐가 더 필요할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할리 퀸에게 "왜 할리 퀸?"라는 질문을 던져 볼 때가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대답이 단순히 "조커"가 아니기를 바라며.


PNN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