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화음악 감상실에서 곱씹어볼 작품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두 번째 영화 <부기 나이트>(1997)다. 70년대 중후반 포르노 업계 사람들의 성공과 좌절을 그린 영화는 당시 유행하던 디스코를 비롯한 수많은 갈래의 음악들이 대거 사용돼 눈과 귀를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한다.


Best of My Love

THE EMOTIONS

폴 토마스 앤더슨이 무려 27살에 발표한 <부기 나이트>는 이제 막 두 번째 영화를 내놓은 거장의 빼어난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다. 3분간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오프닝은 앤더슨의 실력이 탄탄한 기술력까지 닿아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화 제목을 단 극장 간판을 보여주면서, 포르노 영화 감독 잭(버트 레이놀즈)과 배우 매기(줄리앤 무어)가 나이트클럽에 들어서서 그 안 곳곳에서 저마다 흥을 즐기고 있는 <부기 나이트>의 주요 출연진들을 유려한 카메라워크로 훑어나간다.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1990)의 나이트클럽 입장 롱테이크에 비견할 만한 이 시퀀스는 여성 소울 트리오 이모션스(The Emotions)의 'Best of My Life'가 장식한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브레인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가 프로듀싱을 맡은 'Best of My Life'는 디스코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로 손꼽힌다. 이 트랙이 오프닝을 차지했다는 건 <부기 나이트>가 디스코가 세상을 휩쓸던 70년대 중후반을 배경으로 하리라는 걸 자막이 뜨기 전에도 알린다. 잭은 사람이 바글바글 클럽 안에서 저 멀리에서 식기를 정리하는 직원 에디(마크 월버그)와 그의 '물건'을 발견한다. 에디가 홀을 빠져나가면 한국에서도 아주 친숙한 디스코 트랙, 보니 엠(Boney M)의 'Sunny'로 음악이 바뀐다.


Jazz Theme from Sweet (The Sage)

CHICO HAMILTON QUINTET

꽤나 유쾌하게 시작한 <부기 나이트>는 생각보다 일찌감치 인물들의 어둠을 보여준다. 매기와 함께 집에 돌아온 잭은 레코드로 치코 해밀튼 퀸텟(Chico Hamilton Quintet)의 'The Sage'를 튼다. 1957년 개봉한 누아르 영화 <성공의 달콤한 향기>의 재즈 테마곡이다. 무심하게 웅웅 대는 콘트라베이스와 그 위를 음울하게 떠돌아다니는 첼로가 매력적인 인트로는 보통 재즈 오중주단(퀸텟)의 구성과 달리 첼로 연주자가 포함돼 있던 치코 해밀튼 퀸텟의 정체성을 확실히 나타낸다. 매기는 전화통을 붙들고 전남편에게 아들과 인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잭의 조감독 빌(윌리엄 H. 메이시)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서 뒤엉켜 있는 걸 목격하고, 밤늦게 귀가한 에디는 부모 몰래 집에 들어온다. 오프닝의 흥분을 순식간에 부수는 것 같던 리듬은 아폴로 100(Apollo 100)의 'Joy'와 함께 에디의 관심사를 드러나는 이소룡, 알 파치노의 영화 <서피코>, 새빨간 자동차 포스터 등을 보여주면서 다시 본래의 활력을 되찾는다.


You Sexy Thing

HOT CHOCOLATE

2시간 30분을 훌쩍 넘기는 러닝타임의 <부기 나이트>는 비단 쇼트뿐만 아니라 시퀀스도 상당히 길다. 긴 시퀀스에선 음악을 아낌없이 쓰고 있어서, 한 시퀀스를 지나가는 동안에도 노래 세 곡 이상 쓰이는 게 기본이다.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엄마와 싸우고 잭의 집에 찾아온 에디는 파티에 모인 잭의 지인들을 만나고, 그들 모두에게 확실한 매력을 발산해낸다. 집을 박차고 나오면 쓰리 독 나잇(Three Dog Night)의 'Mama Told Me (Not to Come)'이 흐르고, 잭의 영화에 돈을 대는 제임스 대령(로버트 리즐리)이 찾아오면서 워(War)의 'Spill the Wine'이 이어진다. 핫 초콜릿(Hot Chocolate)의 'You Sexy Thing'은 쫄티에 쫄바지를 입은 스카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가 처음 등장하자마자 에디에게 첫눈에 반하는 신에 나온다. 그야말로 '화끈한 당신'. 스카티와 에디가 대화를 나누던 중, 잭은 대령에게 에디를 소개시켜주고, 듣기만 해도 유쾌해지는 이름을 지어보라는 조언을 한 대령은 대뜸 소문으로만 듣던 '물건'을 보여달라고 하고, 그걸 보자마자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맙다"고 말한다. 다시 한번, '화끈한 당신'!


Got To Give It Up

MARVIN GAYE

에디, 아니, 더크 디글러가 등장과 동시에 포르노 업계의 스타로 성장해 부유함을 만끽하는 걸 보여주는 대목에서도 수많은 디스코 명곡들이 사용됐다. KC 앤 더 선샤인 밴드의 'Boogie Shoes'는 비싼 셔츠와 구두를 사 신고 춤출 때, 코모도스(The Commodores)의 'Machine Gun'은 더크 디글러가 극장가와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걸 보여줄 때 쓰여 관객들의 흥을 돋운다. 그 대미를 장식하는 건 마빈 게이(Marvin Gaye)의 'Got To Give It Up'이다. 더크가 그를 아들처럼 생각하는 매기, 아니, 앰버에게 곳곳에 고급 제품들을 채워놓은 집안을 보여줄 때 흘러나온다. 잘게 쪼개진 리듬 위를 통통대며 관능적인 목소리를 흩뿌리는 마빈 게이의 노래 'Got To Give It Up'는 여전히 흑인이 고통받는 세상에 사랑의 가치를 설파한 걸작 앨범 <What's Going On>을 내놓은 뒤 연달아 명반들을 발표한 전성기를 지나 당대의 트렌드인 디스코를 적극 수용한 결과물이다. 포르노 배우로서 전성기를 보내고 이다음 시퀀스부터는 내리막을 걷게 될 더크 디글러의 상황을 빗댄 것 같은 배치다. 2013년을 휩쓴 로빈 씨크(Robin Thicke)의 노래 'Blurred Lines'가 'Got To Give It Up'의 리듬을 지나치게 베꼈다고 고소당하면서 25년이 흐른 뒤에 또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Do Your Thing

THE WATTS 103RD STREET RHYTHM BAND

그리고 80년대가 도래한다. 새로운 시대를 목전에 앞둔 그 날, 여느 때처럼 잭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설렘보다는 불안이 맴돌고 있다. 파티에서도 디스코가 아닌 뉴웨이브와 하드록이 흐르는 가운데, 앰버는 더크에게 코카인을 가르쳐주고, 잭을 찾아온 사업가 플로이드는 이제는 필름이 아닌 비디오의 시대가 오고 있다 충고하고, 스카티는 더크에게 빨간 차를 구입해 자랑하다가 갑자기 입을 맞추다가 망신당한다. 그렇게 서서히 부풀던 불안은 파티에서 아내를 찾던 빌이 어느 방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보면서 그만 터져버리고 만다. (시기상으론 영화에 쓰인 음악 가운데 가장 오래된) 60년대 말 발표된 훵크 트랙 'Do Your Thing'은 제목처럼 빌에게 어떤 결단을 내리도록 주술을 부리는 듯 흐른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본 빌은 넋을 잃고 차로 다가가 권총을 꺼내 돌아와 그대로 방안의 두 사람에게 갈긴다. 1980년이 시작하기 딱 2초 전. 환호하려고 준비하던 사람들의 입에선 비명이 튀어나온다. 총을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긴 빌의 마지막을 보면서 관객은 이제부터 재앙이 펼쳐질 거라는 걸 직감한다.


Compared to What

ROBERTA FLACK

시대가 바뀌었다. 더크는 새로 발탁된 신인 배우한테 질투를 느껴 객기를 부리다가 잭과 연을 끊고 동료들과 함께 마약에 빠진 채 가수가 될 준비를 한다. 의욕은 넘치는데 노래는 더럽게 못하는 걸 보니 돌아가는 본새가 훤하다. 어지러운 건 더크만이 아니다. 잭과 촬영감독은 이제 후진 화질의 비디오로 (더 자극적인 폭력을 담은) 포르노를 찍고, 앰버와 롤러걸(헤더 그레이엄)은 방안에 틀어박혀 마주 앉아 마약에 빠져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감각보단 의욕이 훨씬 넘치는 벅(돈 치들)은 포르노 업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대출을 거절당한다.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의 노래 'Compared to What'은 그저 흥겹기만 해서 비극적인 분위기가 중화되는데, 그나마 노래마저 끝나고 나면 훨씬 더 처참한 상황이 펼쳐진다.


Jessie's Girl

RICK SPRINGFIELD

마약에 빠져 돈을 모두 날려버린 더크 일행은 "돈은 하느님만큼 많고, 코카인과 대마초는 하느님보다 2배 많"은 부자 리차드에게 가짜 마약을 팔러 간다. 일행 모두 애초에 불안에 떨고 있는 와중 리차드 집안의 이상한 분위기는 그 불안을 더욱 부풀린다. 반쯤 벗은 채로 술과 마약에 절어서 총알이 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리차드뿐만 아니라 어느 중국인은 돌아다니면서 계속 폭죽을 터트리고, 거구의 흑인은 몸에 총을 지니고 있다. 리차드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모은 믹스테이프에선 80년대의 음악만 나온다. 처음 더크 일행이 방문했을 땐 하드록 밴드 나이트 레인저(Night Ranger)의 최고 히트작 'Sister Christian'이 나오더니만, 리차드가 "누가 명령하는 건 딱 질색"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 테이프가 딱 끊기고 릭 스프링필드(Rick Springfield)의 'Jessie's Girl'이 나온다. 노래는 한껏 더 밝아졌는데, 이 이상한 공간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크 일행은 불안에 떤다. (1분간 멍하니 생각에 빠진 마크 월버그의 연기가 일품이다!) 하지만 토드가 생각지도 못하게 총을 꺼내 들어 돈을 다 내놓으라고 하면서, 힘차고 가벼운 리듬에 "제시 여자친구가 탐나 죽겠어" 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노래는 순식간에 총격전의 BGM이 된다.


God Only Knows

THE BEACH BOYS

그 난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부기 나이트>는 해피엔딩이다. 더크, 아니, 에디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은 잭과 매기의 곁으로 돌아온 후, 인물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진다. 식당에서 벌어진 총격전 덕분(?)에 벅이 꿈에 그리던 오디오 가게를 열어 잭의 스탭들이 광고를 찍어주고, 롤러걸은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고, 모리스(루이스 구즈만)는 형제들의 이름을 내건 나이트클럽을 오픈하고, 리드(존 C. 라일리)는 마법사로 활동한다. 그중 가장 감동스러운 건 늘 시대착오적인 취향을 고집하던 벅이 유일하게 그의 취향을 존중해준 제시와 가정을 꾸려 귀여운 아이를 낳고, 비로소 시대에 딱 맞는 힙합 패션을 즐기고 있는 풍경이다. 각자의 시대가 돌고 돌아 결국 모두가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는 환상 같은 낙관이 있다. <부기 나이트> 속에서는 줄곧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였던 60년대의 최고 노래로 손꼽히는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의 'God Only Knows'는, 이런 흥망성쇠를 통과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밝을 날이 올지는 '오직 신만이 알'리라는 복음처럼 들린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