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는 영화계가 낳은 최고의 스테디셀러다. 80년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대중의 시야 한가운데에서 단 한 순간도 멀어진 적 없는 배우. 수많은 스타가 소리 없이 등퇴장한 연예계에서 자신의 영역을 쉬지 않고 확장해 온 아이콘. 아버지 세대와 Z세대를 거리감 없이 이어 줄 수 있는 메신저. 그래서 문득 든 생각.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저마다의 김혜수를 품고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김혜수는 첫사랑이다. 김혜수가 박중훈과 <깜보>(1986)를 찍은 게 16살 때다. <깜보>는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였고, 김혜수는 나이보다 많은 밤무대 가수 나영을 연기하며 스크린에 데뷔했다. 김혜수 캐스팅을 위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은 이황림 감독의 근성이 이룬 결과였다. 영화 흥행은 저조했다. 그러나 김혜수는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받았고, 쏟아지는 캐스팅 제의 속에서 빠르게 스타가 됐다. 혹자는 김혜수가 이른 나이에 연기를 시작해서 인기를 얻은 것을 두고 ‘원조 국민 여동생’이라고 표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녀는 ‘국민 여동생’일 수 없었다. 이황림 감독이 그랬듯, 대중들도 일찍이 그녀에게서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김혜수는 여동생이 아닌, 판타지의 대상으로 뭇 남성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존재였다. ‘책받침 스타’라는 칭호는 그녀의 당시 인기를 엿보게 하는 수식어 중 하나였다. 전국 8도 학생들이 그녀의 얼굴 사진이 코팅된 책받침을 책받침 용도가 아닌 관상용으로 아꼈다. 당시 사랑받은 ‘책받침 스타’는 김혜수 말고도 여럿 있었으나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를 뜨겁게 지나, 2020년대도 활기차게 열어젖힌 ‘책받침 스타’는 김혜수가 유일하다.
누군가에게 김혜수는 관능미의 여신이다. ‘섹시하다.’ 김혜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다. 그런데 김혜수는 이 섹시하다는 의미를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해왔다. <한지붕 세가족>(1991)의 신세대 새댁, <짝>(1994~1998)의 항공사 승무원, 영화 <닥터 봉>(1995)의 콧대 센 작사가, <김혜수의 플러스 유> MC 등을 통과하며 김혜수는 자기주장 강한 ‘신여성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했고, 청룡영화상이 열릴 때마다 관능이 무엇인지를 드레스 하나로 입증해 보였다. 눈여겨볼 것은 김혜수의 외부를 향하던 ‘섹시하다’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그녀 내부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대중은 서서히 김혜수가 보여주는 ‘어떤 태도’에서 다른 의미의 섹시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성의 몸이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어 온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당당하게 맞선 태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시상식장에서 재회한 옛 연인에게 응원을 보낼 때, 작품과 작품 속 배우의 매력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 노미네이트된 영화 대부분을 챙겨보고 청룡영화상 진행자로 나설 때, 번역본이 없는 미출간 도서를 읽기 위해 개인적으로 번역을 의뢰할 때,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지만 미얀마 어린이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봉사 일정을 택했을 때 김혜수는 진정 섹시했고, 아름다웠다.
누군가에게 김혜수는 개척자다. 그녀는 작품 수에 비해 작품 운이 많은 배우는 아니었다. 한때 많은 창작자들은 김혜수가 지닌 건강하고 섹시한 이미지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김혜수는 작품 안에서 다양해지고 싶어 했으나, 타고난 미모가 오히려 덫으로 그의 발목을 잡아챘다. 스타가 아닌 배우로 서고 싶은 김혜수의 갈망은 점점 강렬해지는 듯했다. 기존에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펼쳐 보였던 <쓰리>(2002)가 그에 대한 선전포고였다면, <얼굴 없는 미녀>(2004)와 <분홍신>(2005)은 그녀 자신과의 신명 나는 전쟁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타짜>(2006) 정마담을 만나 만개했다. ‘이대 나온 여자’ 정마담으로 김혜수는 한국 영화 팜므파탈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고 배우로서 사랑받았다. <타짜>로 터닝 포인트를 맞은 김혜수는 <도둑들>을 통해 또 한 번 대중의 마음을 훔쳤다. 끝이 아니다. 드라마는 더욱더 흥미진진해진다. <차이나타운>(2014) <시그널>(2016) <국가부도의 날>(2018) 등으로 이어지는 행보를 통해 여배우들의 영토를 조금씩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 배우들 운신의 폭이 좁은 한국영화계에서 김혜수는 남성 배우의 조력자이거나 소모되고 끝나는 기능적 캐릭터가 아닌, 그 자체로 충만한 캐릭터들을 하나둘 클리어하며 그 스스로가 새로운 길이 됐다.
누군가에게 김혜수는 롤 모델이다. 롤 모델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동경 가득 담긴 눈빛을 받는 일. 자신이 밟아 온 자갈길이 누군가의 희망 로드가 되는 일.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만, 된다고 해도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책임이 따르는 자리. 그것이 지금 김혜수의 자리다. 어느 순간부터 김혜수의 행보는 그녀 개인의 이력에 머무르지 않고 해당 업계에 영향력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보는 후배들에게 자극이자, 귀감이며 거대한 힘이 되고 있다. 배우가 연기로 인정받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건 함께 길을 걷는 이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자가 개인을 향하는 일이라면, 후자는 연대를 부르기 때문이다. 변화는 연대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김혜수는 부단히 자신과 싸우는 사람, 그래서 더 지켜보고 싶은 배우다. 얼마 전 <밀양>의 전도연 송강호를 언급하는 김혜수의 인터뷰가 쏟아졌다. <내가 죽던 날> 인터뷰 자리에서 나온 말로, 전도연 송강호의 연기력에 찬사를 보내며 김혜수는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있었다. 김혜수의 과거 인터뷰를 찾아보면 알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단점을 이야기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쪽이다. 완벽한 인간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부단히 싸우는 삶. 모친의 채무와 관련된 논란을 솔직히 언급한 것도 이러한 성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마 김혜수는 전도연이나 송강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전도연이나 송강호도 김혜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연기가 어떻다는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지닌 색깔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다. <밀양>을 말할 때 전도연 아닌 배우를 떠올리기 힘들듯, <타짜> 정마담을 떠올릴 때 김혜수 말고 누가 가능하단 말인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결핍 안에서 부단히 노력하기에 더 눈길 가는 이 겸손한 아이콘이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험난한 세상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며 걸어가길 희망한다. 그럼으로써 또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머무르길, 그러길 진심으로 바란다.
글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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