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어른들만 죽는 바이러스가 퍼졌다. 세상엔 아이들만 남았다. 사춘기를 넘기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한부들만 남은 세상. 법이 없는 세상에서 제멋대로의 법을 만들어 살아가는 아이들로 인해 세상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안나(줄리아 드라고토)는 동생 아스토르(알레산드로 피코렐라)와 함께 숲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살고 있다. 집안 곳곳엔 쓰레기가 수북하게 쌓여있고, 침대엔 여러 보석으로 치장된 엄마의 유골이 놓여있다.
죽기 직전의 엄마는 안나에게 미션을 남겼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을 지켜낼 것. 안나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동생 아스토르를 지켜내기 위해, 집을 둘러싼 숲을 벗어난 바깥공기는 유독하다며 경고한다. 안나는 집에 아스토르를 남겨둔 채, 음식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홀로 도시로 나선다.
도시에선 ‘파란 아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약탈을 행하는 등 잔혹한 일을 일삼는 이들은 여왕 안젤리카(클라라 트라몬타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동생과 저만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던 안나의 삶에 파장이 일기 시작한 건, 파란 아이들이 집에 있던 아스토르를 납치하고서부터. 동생을 구하기 위해 파란 아이들의 성으로 향하던 안나는 생존을 위한 본능에 물들어버린 여러 또래들을 마주하고, 그들의 야만성을 겪어내며 점점 강인해진다. 안나는 이 모든 역경을 뚫고 파란 아이들로부터 동생을 구할 수 있을까?
재난 장르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기침을 하고 홍열과 피부병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는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이하 <안나>)의 바이러스 위로 누구나 현시대의 풍경을 겹쳐볼 수밖에 없을 것.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기 이전 기획되어 더 놀라운 <안나>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삶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겪는 아이들을 동화스러운 연출로 녹여낸 기묘한 성장담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을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6부작으로 구성된 <안나>은 오직 왓챠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니콜로 암마니티 : 원작자가 연출자
이 시리즈는 2015년 니콜로 암마니티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촬영 시작 6개월 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다.
-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 오프닝
<안나>는 위와 같은 문구로 에피소드의 막을 연다. 이탈리아의 유명 작가 니콜로 암마니티가 2015년에 공개한 소설 <안나>는 이탈리아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니콜로 암마니티는 “소설 <안나>를 집필한 후 몇 년 동안 이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녀가 이 위기를 어떻게 마주하는지, 어떻게 엄마가 되지 않고 엄마의 역할을 해내는지, 어떤 미래를 상상하는지, 이 이상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며, 니콜로 암마타니는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젊은 여성, 안나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나갔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떠올랐고, 그는 <안나>를 카메라에 담기로 결정했다. 니콜로 암마니티는 자신의 연출 데뷔작 <일 미라콜로>를 함께 쓴 작가 프란체스카 마니에라와 함께 <안나>의 시나리오를 썼고,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바이러스 : 현시대와의 우연한 접점
<안나>는 촬영 중간 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유인즉슨 오프닝 멘트처럼 촬영 시작 6개월 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었기 때문.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초기, 이탈리아에선 끔찍한 뉴스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 작품을 통해 끔찍한 전염병의 결과를 다룬 제작진과 출연진이 느낀 기시감이 어땠을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하다.
<안나>는 제작 중단 4개월 후인 2020년 7월부터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제작진은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바이러스를 떠올릴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어린 시절에서 성인으로의 자연스러운 성장이 복잡한 시기에 살고 있”으며, <안나>의 핵심은 “어른과 아이들 사이의 관계”라고 덧붙였다. 어른이 없는 세상에서 이상한 어른으로 자라난 아이들의 성장을, <안나>는 어떻게 담아냈을까?
기묘한 성장담 : 너무나도 현실적인 잔혹동화
아이들은 주로 순수함을 상징하는 존재로 쓰인다. <안나>의 세상에서 순수함에 기댔다간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이 세계에선 강한 아이들의 말이 곧 법이다. 아이들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고, 그로 인해 벌어진 행동의 결과를 외면한다. 안나는 동생을 찾는 과정에서 외로움에 젖은 친구를 만나 우리에 갇히거나, 야만적인 의식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어떤 그룹에 속하며 집단적 연대감을 느끼거나, 정서 발달로 인해 더 섬세한 감정 표현이 가능해지고, 본능적으로 놀이에 끌릴 수밖에 없는 시기. 아이들의 특성 위로 아무런 규제 없는 생존 본능이 겹쳐질 때,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존재가 된다.
<안나>는 잔인함엔 나이가 없다고 말한다. 무자비한 기회주의자들이 된 아이들은 작품 초반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과거 속 어른들의 모습과 닮아있기도 하다. 상상력과 현실성을 적당한 비율로 덜어 섞어낸 잔혹 동화 같은 아이들의 세계는 몰입감을 더하기 충분하다.
<안나>의 아이들 : 연기 경력 없는 신인들
이 세계를 실감 나게 구축한 배우들의 설득력 있는 연기가 작품의 핵심 축이 되어준다. <안나>의 에피소드는 각 회차를 대표하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주인공 안나뿐 아니라,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디딘 안나의 동생 아스토르, 파란 아이들을 손에 쥐고 흔드는 사악한 여왕 안젤리카, 안나와 이성적 교감을 나누는 피에트로(지오반니 마빌라), 바이러스를 피해 간 유일한 어른이라 파란 아이들에게 인질로 잡힌 카티아(로베르타 마테이)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품은 이야기를 균형감 있게 녹여내 지루함을 덜고 서사에 풍성함을 더했다.
자신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낸 배우들의 얼굴에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안나를 연기한 줄리아 드라고토는 2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배역을 따냈다. 분노와 두려움 그를 딛고 피어난 용기와 결단력 빛나는 얼굴까지, 삶을 관통하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며 극을 이끈 믿음직한 주역. 연기 학원조차 다닌 적 없는 10대 배우의 첫 연기였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모험에 큰 지지자가 되어준 피에트로를 연기한 지오반니 마빌라, 안나의 가르침에 따라 바라지 않은 순수함을 내비쳤던 동생 아스토르를 연기한 알레산드로 피코렐라 모두 <안나>가 데뷔작인 신인 배우다. 앞으로 어떤 작품에서 만나게 될지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탈리아의 신선한 얼굴들을 기억해두자.
기괴한 아름다움 : 취향 확고한 미술, 촬영, 음악
연출, 촬영과 음악의 환상적인 조합은 <안나>의 기묘한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오프닝에 흘러나오는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 크리스티나 도나의 ‘세템브레’(Settembre)를 비롯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이 <안나>의 사운드트랙을 메우며 몽환적인 느낌을 더했다. 영국 그룹 베슬의 ‘레드 섹스’(Red Sex)는 아주 중요한 장면에서 흘러나온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예고편에 사용되어 국내 유명해진 곡이다.
촛불, 횃불이나 자연광을 이용한 촬영 기법으로 전기가 없는 멸망한 세상의 리얼함을 전한 <안나>의 모든 장면은 엽서처럼 아름답다. 바이러스로 인해 망해버린 세상을 조명한다고 해서, 먼지와 쓰레기만이 나뒹굴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 작품이 전하는 시각적 즐거움을 중요시 여기는 시청자라면 1화, 안나와 피에트로가 파란 아이들을 피해 숨은 성당의 계단을 덮은 색색깔의 의상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안나>는 최악의 상황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아이러니함, 그 극명한 대비로 극에 강렬함을 더한다. 청소년들은 바이러스의 징조를 가리기 위해 하얀색, 파란색 물감으로 피부를 덧칠한다. 파란 아이들의 의상은 곳곳이 찢기고 오염됐지만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것처럼 독창적이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에트나 화산의 일출 풍경을 보며 썩어가는 자신의 육체와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청소년, 아름다움 웨딩드레스를 입고 핏물이 담긴 욕조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의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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