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열아홉 번째 장편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3월13일 오후 언론에 첫 공개됐다. 2015년 개봉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 이어 홍상수와 배우 김민희가 두 번째로 함께 작업한, 지난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김민희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다. 국내 언론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번 영화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 참석했고, 수많은 언론들이 몰려드는 이례적인 풍경이 벌어졌다. 간담회 중 밝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영화 자체는 주목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어떤 영화인지 간단히 소개해보도록 한다.


영화는 두 파트로 나뉜다. 1부의 배경은 독일 함부르크. 가정이 있는 영화감독과 헤어진 배우 영희(김민희)는 독일에서 지영(서영화)과 조용한 마을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낸다. 영희는 그쪽으로 찾아오겠다는 감독의 연락에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평화로운 가운데 아닌 척 내내 그를 그리워 한다. 그리고 배경은 강릉으로 바뀐다. 독일에서 귀국한 영희는 강릉을 찾아 영화 일을 하는 선배들을 만난다. 따뜻하고 날선 말이 오가던 술자리가 이어지고, 영희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면서 여전히 계속 감독을 생각한다. 1부와 2부를 오랫동안 홍상수 영화의 촬영을 맡아온 박홍열 감독, 김형구 감독이 각자 촬영을 분담했다.

우선 홍상수 영화에 여럿 출연했던 배우들이 눈에 띈다. 히로인 김민희는 물론 서영화, 권해효, 정재영, 문성근, 송선미, 안재홍 등 배우들이 모였다. 물론 전작들과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뚜렷한 접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전 작품들에서 각 배우가 맡았던 역할과 설정이 다시 한번 엿보일 때 생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릉에 사는 선배인 천우로 분한 권해효가 갑자기 프레임에 들어와 "너 나 몰라?"라고 하고 물을 때, 자연스럽게 작년 개봉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속 권해효가 떠올라 웃음이 터지는 식이다. 술자리에서의 대화를 한 호흡으로 촬영하고, 느닷없이 시선을 잡아끄는 줌인, 토씨 하나하나 말의 맛이 살아 있는 대사 등 또다른 인장들도 고스란하다.

하지만 유사함보다는 다름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홍상수는 근작들의 오프닝 크레딧을 원색 배경에 본인이 직접 쓴 글씨로 채워왔는데, 이번엔 까만 배경에 신명조체로 무뚝뚝하게 크레딧을 채웠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역시 여느 홍상수 영화처럼 계절감이 뚜렷한 날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오랜 설정 아래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 관계가 피어나는 과정이 (홍상수의 작품이 주로 '연애 영화'인 것도 이와 관련한다) 홍상수 영화의 주된 서사였다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는 함부르크와 강릉 두 곳에서 모두 오래 알던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거나 간혹 새로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들과의 거리감은 좀체 좁혀지지 않는 상태에서 그치고 만다.

홍상수 감독은 대개 꿈 혹은 상상을 통해 판타지를 영화 속에 끌어왔는데, 이번엔 (박홍열 촬영감독이 직접 연기한) 무명의 남자가 홀연히 등장을 반복하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프레임 안에서 어른대는 남자의 존재는 날카롭고 포근한 대화가 오가는 순간에 주름을 만들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곤두세우도록 이끈다. 주인공의 마음을 울려퍼지게 했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도 자취를 감췄다. 대신 그 자리를 음악이 채우고 있다. 오랫동안 홍상수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던 정용진이 만든 스코어가 아닌,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C장조 D.956 2악장'과 김민희가 담배를 피면서 흥얼대는 노래가 영희의 비통한 마음을 대신한다. 인물들이 수평으로 공간을 가로지르는 숏처럼 생경한 이미지도 여러번 등장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홍상수 영화의 새로운 도약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놉시스를 읽은 이들이라면 즉각적으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이야기가 홍상수와 김민희의 실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젊은 여성 배우와 나이든 영화감독, 둘의 관계로 인해 배우가 오랫동안 활동을 멈춘다는 이야기가 호사가들의 구미를 자극한 게 사실이다. 기자간담회 당시 이와 관련한 질문이 나왔고, 홍상수 감독은 "어떤 디테일도 내 속에서 촉발되지 않은 게 없다. 그게 개인의 어떤 삶을 재현하거나 개인적인 선언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미묘한 선을 하나하나 밟아가나다보면, 솔직한 태도로써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며 이별을 견뎌내는 한 사람의 절절한 마음만이 빛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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