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이후 26년 만에 돌아온 실사판 <미녀와 야수>의 열풍이 대단하다. 북미에선 10일 만에 3억불을 돌파한 역대 네 번째 영화로 올라섰고, 전 세계적으로도 7억불을 넘는 흥행을 기록 중이다. 국내에서도 개봉 3주차를 지나 벌써 400만명을 넘어서며 봄철 비수기란 말이 무색하게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올 초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라라랜드>의 헤로인 자리를 걷어차고 출연한 엠마 왓슨의 선택은 이로써 어느 정도 보상되지 않았나 싶다. <뮬란>과 <알라딘>의 실사화를 대기 중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아 앞으로도 계속 순항할 것으로 보인다.
워낙에 전설적인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라 많은 우려도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마법에 걸린 사랑>을 필두로 <백설공주>와 <말레피센트>, <신데렐라>로 이어지며 라이브 액션 노하우가 축척된 디즈니는 자신 있게 <미녀와 야수> 카드를 꺼내들었다. <브레이킹 던> 1, 2부와 <갓 앤 몬스터>, <킨제이> 등으로 탄탄한 드라마 실력을 인정받고, 뮤지컬 <시카고>의 각본과 <드림걸즈>를 연출한 바 있는 빌 콘돈 감독을 수장으로 앉힌 디즈니는 엠마 왓슨과 댄 스티븐슨 두 젊은 배우를 주축으로 루크 에반스와 케빈 클라인, 이완 맥그리거, 이안 맥켈렌, 엠마 톰슨, 스탠리 투치 등 화려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여기에 <월플라워> 감독인 스티븐 크보스키의 각본과 오스카 4회 지명에 빛나는 사라 그린우드의 현란한 미술, 영국 영화의상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재클린 듀런의 빼어난 의상에 빌 콘돈과 호흡을 맞춰왔던 토비어스 스크라이슬러의 촬영과 버지니아 카츠의 편집 등 실력파 스탭진들이 대거 합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실사판 <미녀와 야수>를 돋보이게 만드는 건 바로 음악에 오리지널 작곡가였던 알란 멘켄이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70~80년대 침체돼있던 디즈니의 부활을 가져온 일등공신이자 디즈니 황금기의 주역이고, 현존하는 (경쟁 부문) 최다 아카데미 수상자이기도 한 멘켄을 빼놓고서 이 작품을 논한다는 건 가히 불가능에 가깝다.
그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번 <미녀와 야수> 사운드트랙은 2주째 빌보드 사운드트랙 차트 1위를 기록 중이며, 빌보드 200에서도 ‘드레이크’와 ‘에드 시런’이란 강력한 컴백 폭풍을 맞으면서도 2주째 3~4위권에서 선방하고 있다. 셀린 디온과 피보 브라이슨이 부른 원곡에 비하면 많이 아쉽다는 평이 많은, 아리아나 그란데와 존 레전드의 주제가이지만, 알란 멘켄의 유려한 멜로디와 하워드 애시먼의 아름다운 가사가 어우러진 이 곡의 존재감은 여전히 끝판대왕 급의 강력한 포스를 내뿜는다. 춘궁기에 새로운 디즈니 신화를 써내려가는 영화의 흥행을 바라보며 과거 몇 차례나 만들어졌던 <미녀와 야수>들의 여러 사운드트랙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946년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
Music by 조르주 오리크
영화 <미녀와 야수>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선 단연 1946년에 만들어진 장 콕도 버전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처음 만들어진 '미녀와 야수'의 장편 영화이자 일개 전래동화를 일약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이 작품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몽환적이며 강렬한 미학적 성취를 안긴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이고, 안무가이자 소설가, 화가였던 전방위적인 천재 장 콕토의 심미안과 탁월한 재능을 마음껏 엿볼 수 있는데, 지금 봐도 여전히 세련되고 놀라운 비주얼과 환상적인 미장센, 다양한 함의와 상징 등을 고전적인 내러티브에 풀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힘을 보태는 건 장 콕토의 음악적 동반자이자 클래식 작곡가였던 조르주 오리크의 음악이다.
오네게르와 미요 등과 함께 프랑스 현대음악을 이끌었던 ‘6인조’ 중 한 명이었던 오리크는 발레음악의 1인자이자 <리피피>나 <공포의 보수>, <로마의 휴일> 등의 음악을 맡은 영화음악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콕토의 탐미적인 비전에 걸맞는 고전적이고도 정갈한 양식미를 선사하고 있다. 라벨이나 드뷔시에게 영향을 받은 그의 사운드는 프랑스 특유의 소박하지만 감성적이고 섬세한 선율을 잘 살려내고 있는데, <미녀와 야수>는 그런 오리크의 본질적인 요소와 장르적인 접근법이 잘 조화된 스코어다. 오리지널 연주는 따로 남아있지 않지만 낙소스 레이블에서 고증에 맞춰 복원된 음악을 통해 오리크의 의도와 목표를 고스란히 맛 볼 수 있다.
1987년 TV시리즈 <미녀와 야수>
Music by 리 홀드릿지 & 돈 데이비스
<미녀와 야수>는 수차례 영화와 TV로 만들어졌는데, 그 중 1987년부터 90년까지 3시즌 동안 CBS에서 방영된 <미녀와 야수>는 대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형사물과 로맨스물이 반반씩 섞인 채 색다르게 변주된 작품이다. ‘사라 코너’로 유명한 린다 해밀턴이 전형적인 미인상에서 벗어나 강인하며 동시에 이지적인 미녀 역을 소화했으며, ‘헬보이’ 론 펄먼이 야수로 나와 자신의 이미지와 야수를 120% 소화해냈다. 제법 인기가 있던 시리즈였지만 임신으로 린다 해밀턴이 2시즌에 죽음으로 하차하자, 3시즌부터 시청률이 급하락하며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말았다. 이후 2012년엔 크리스틴 크룩과 제이 라이언이 출연한 리메이크 시리즈가 나오기도 했다.
87년 방영된 시리즈의 테마는 <갈매기의 꿈>과 <비스트마스터>, <스플래쉬> 등으로 잘 알려진 영화음악가 리 홀드릿지가 작곡해 고혹적이면서도 애잔한 선율을 들려준다. 각 에피소드의 음악은 <매트릭스> 시리즈로 유명한 돈 데이비스가 주로 담당했는데, 홀드릿지의 테마를 다양하게 변주해가며 도시 속 동화와 같은 판타지와 로맨스를 효과적으로 구현해냈다. 제임스 호너와 알란 실베스트리, 마이클 케이먼과 데이빗 뉴먼 등 할리우드 일급 영화음악가들의 오케스트레이터로 활약했던 경력이 말해주듯 돈 데이비스의 솜씨는 상당히 인상적인데, 극중 빈센트가 읽는 싯구와 함께 사운드트랙에 담겨져 더욱 드라마의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1991년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Music by 알란 멘켄 & 하워드 애시먼
가장 잘 알려진 <미녀와 야수>이자 가장 유명한 버전으로, 디즈니가 30년대와 50년대에 제작을 시도했지만 어두운 분위기에 포기하다 세 번째 만에 완성했다. 애니메이션 최초로 1억불이 넘는 흥행을 한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부문이 따로 나눠져 있지 않던 시절 오스카 역사상 최초로 애니메이션이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등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그중 주제가상에만 총 5곡 중 무려 3곡(‘Beauty and the Beast’, ‘Belle’, ‘Be Our Guest’)을 후보로 올리며 시상 전부터 이미 알란 멘켄과 하워드 애시먼 콤비의 수상을 기정사실화했다. 멘켄은 <마법이 걸린 사랑>에서도 주제가상 부문에 3곡을 후보로 올렸고, 결국 그 이후 한 작품에서 최대 2곡까지만 후보에 올릴 수 있도록 오스카 규정이 개정되었다.
당시 신인 아닌 신인이었던 셀린 디온과 듀엣 베테랑 피보 브라이슨이 부른 동명의 주제가는 그해 빌보드 HOT100 차트에 9위까지 올라갔으며, 일본에선 플래티넘을 기록하고, 미국에선 230만장이나 팔리는 등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했다. 그해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휩쓸었으며, 그래미상에서도 3개 부문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1992년엔 아이스쇼로, 1994년엔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돼 높은 인기를 끌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이 개봉되기 8개월 전 작사가이자 프로듀서였던 하워드 애시먼은 마흔의 나이에 AIDS로 타계했다. 멘켄은 이후 팀 라이스, 스티븐 슈왈츠와 팀을 이루며 그 신화를 이어간다.
1994년 씨네 오페라 <미녀와 야수>
Music By 필립 글래스
현대음악가이자 영화음악가인 필립 글래스는 장 콕토의 영화 <미녀와 야수>에 모든 사운드를 지워버리고 새롭게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를 덧입히는 대범한 시도를 펼쳤다. 단순히 음악만 새롭게 작곡한 게 아니라 배우들의 대사 싱크까지 맞춰가며 전위적인 '씨네 오페라'로 장르 자체를 재정립했기에 그 의미가 크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시에 챔버 오케스트라와 성악가가 연주하는 이 공연은 무대와 영상, 음악이 하나로 합쳐지는 색다른 실험이자 통합의 장이고, 경배를 넘어 고전이 다시 생명력을 얻는 재창조의 경지로 신선한 충격과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와 다양한 예술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립 글래스였기에 가능한 작품이었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답게 짧고 반복적인 선율이나 리듬을 통해 점층과 고조,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 독특한 결과물은 장 콕토의 탐미적이고 모던한 영상과 어우러지며 익숙한 동화에 기묘한 분위기와 전위적인 질감을 심어주는데, 작년 국내에서도 초연돼 많은 극찬과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오리크의 원래 스코어가 고전적이고 관습적인 영화음악으로서 콕토의 예술적 성취에 조력했다면, 글래스의 아방가르드한 변형은 장르적인 충돌과 조화를 통해 콕토의 예술적 도전에 예를 표한다. 고전이라는 형태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민하고 화두를 던지는 필립 글래스의 음악은 <미녀와 야수>를 더 특별하게, 장 콕토를 더욱 놀랍게 만든다.
2014년 크리스토프 갱스의 <미녀와 야수>
Music by 피에르 아데노
<늑대의 후예들>과 <사일런트 힐>로 인상적인 세계관을 펼쳐 보인 바 있는 크리스토프 갱스 감독이 디즈니 각색과 달리 원전에 기반을 둔 채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 작품으로, 레아 세이두가 미녀를, 뱅상 카셀이 야수 역을 맡아 색다른 케미를 보여준다. 장 콕토의 후예들답게 무엇보다 탐미적이고 화려한 비주얼이 스크린을 압도하는데, 아쉽게도 그 이상의 성취나 감동을 전달하는 데엔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원색의 조화와 할리우드 스탭진들을 끌어들여 스케일의 미학을 극대화한 CG 등 기술적인 성취는 대단히 인상적이며, 프랑스의 중견 작곡가 피에르 아데노가 담당한 음악 역시 매혹적이며 짜릿하다.
주로 슈테판 아이허나 샤를 아즈나부르, 미쉘 휘겡 등의 가수들과 작업하고, 배우이기도 한 샘 카르만이 연출한 작품들이나 <사랑해 파리> 등에서 음악을 맡은 바 있는 피에르 아데노는 그리 유명한 작곡가는 아니지만, 앞서 언급했던 다른 <미녀와 야수>들처럼 인상적인 스코어를 자아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의 화려한 비주얼에 전혀 뒤지지 않는 고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그의 관현악 사운드는 프란시스 레이나 미셸 르그랑, 조르주 들르뢰 등 전통적으로 로맨틱한 선율을 잘 뽑아내었던 프랑스 선배 영화음악가들의 뒤를 잇고 있으며, 할리우드 작법을 충실히 따라가는 서사는 익숙한 기시감을 주는 동시에 원작과 또 다른 해석과 은유를 전달하고 있다.
2017년 디즈니 실사판 <미녀와 야수>
Music by 알란 멘켄 & 하워드 애시먼 & 팀 라이스
알란 멘켄이 다시 진두지휘한 이번 실사판의 음악은 철저히 1991년 원작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26년이란 시간이 흐른 만큼 변해버린 음악 스타일과 확 바뀐 캐스팅 그리고 라이브 액션이란 형식에 맞춰 변화가 엿보이는데, 이미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아이스쇼 등 여러 형식을 거쳐 다양하게 이식과 변화가 있었던 터라 멘켄은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놀라운 음악들을 들려준다.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의 원 주제곡은 아리아나 그란데와 존 레전드에 맞춰 R&B/소울 풍으로 편곡됐으며, ‘Belle’과 ‘Gaston’, ‘Be Our Guest’의 가사들은 부분 수정되었다. 스코어들은 실사판에 맞게 더욱 스케일을 키우고 드라마틱한 서사를 부여했다.
그 외에도 원작에선 없었던 ‘How Does a Moment Last Forever’와 ‘Days in the Sun’, ‘Evermore’ 3개의 신곡이 추가됐으며, 원 주제가를 불렀던 셀린 디온이 다시 복귀해 커튼콜 형식의 엔드 크레딧을 책임지고 있다. 삶의 중요한 순간을 기억하라는 아름다운 팀 라이스의 가사와 인상적인 멜로디 제조기 멘켄의 명불허전의 선율 그리고 소름 끼치는 셀린 디온의 감동적인 목소리가 어우러진 ‘How Does a Moment Last Forever’는 이번 실사판 <미녀와 야수>의 진 주제곡으로 영화의 감흥을 더하고 있으며, 여기에 명품 보이스 조쉬 그로반도 ‘Evermore’에 목소리를 빌려주며 이번 사운드트랙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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