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방송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할 때 함께 일하던 팀장님과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었어요. 길에 핀 꽃들에 둥근 망울이 맺히기 시작했으니 때는 아마도 초봄이었겠죠. 함께 길을 걷던 선배가 “어떤 계절을 좋아해? ”라고 물었어요.
“ 전 겨울이 좋아요. ”
“ 왜? ”
“ 따뜻해서요. ”
당시 저에게 겨울이라는 계절은 춥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느낌이 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배는 “난 봄이 좋아. 겨울은 모든 게 죽어가는 느낌이거든. 봄의 생동감이 얼마나 좋은지는 아마 나이가 들수록 더 느끼게 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죠. ‘정말 그럴까? 봄이 좋아질까? 이 나른한 봄이 과연 좋아지는 날이 오긴 할까?’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시절만을 기억합니다. 사실 할아버지는 늘 바람을 피워 할머니를 외롭게 만든 장본인이었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나쁜 기억을 다 잊고 예쁘게 사랑했던 그 ‘봄날’만을 기억하는 거죠. 그런 할머니와 함께 사는 상우(유지태 분)의 직업은 사운드 엔지니어입니다. 그는 지방 방송국으로부터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일을 의뢰 받고 라디오PD인 은수 (이영애 분)을 만나러 갑니다. 낡은 기차역 대합실을 배경으로 한 그들의 첫 만남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른 채 졸고 있던 은수의 사랑스러운 모습이라니요.
그들은 함께 소리를 담으러 떠나는 여정을 통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랑에 빠집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은 은수부터였어요. 그와의 헤어짐이 아쉬웠던 그녀는 “라면 먹고 갈래요?”하고 먼저 말을 걸었거든요.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어 늘 붙어있으려는 젊은 남녀의 장거리 연애는 라면을 계기로 시작됩니다.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그들은 추억을 공유하고 사랑을 쌓아갑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유효기간이 짧게만 느껴집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해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던 은수는 집에 인사하러 가자는 상우의 프러포즈에 “나 김치 못 담가.”라는 묘한 대답을 남깁니다. 그녀의 일상이 라면과 같다면 결혼이란 ‘김치’가 주는 관습적인 느낌과 더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그들은 라면 외의 음식을 함께 먹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 온 다음날, 그는 북엇국을 끓이지만 그녀는 먹지 않습니다. 은수에게 그런 음식은 구속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결국 그들 사이에 큐피드의 화살이 되었던 라면은 결국 싸움의 원인으로 둔갑해 “내가 라면으로 보이니?” 라는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은수라는 여자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상우의 말처럼 ‘어떻게 사랑이 변할까? 이 여자의 사랑은 참 얄팍하구나.’생각했죠. 은수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도 문득 떠오른 기억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화분을 들고 찾아가는 속없는 여자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오래 흐르고 영화를 다시 보니 상우에게 감정 이입이 됐던 마음이 은수에게도 열립니다. 상우와 달리 변해버린 사랑의 아픔을 이미 겪어 본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이란 거짓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기적으로만 보였던 그녀의 사랑 방식은 사실 그녀를 스쳐간 인연들이 남긴 또 다른 자화상이었나 봅니다. 시간이 흘러 이런저런 경험치를 갖고 돌아보니 은수가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그 곪은 상처가 고스란히 보여서 안타깝네요. 그래서 상우가 아닌 은수를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옵니다. 지금쯤은 그녀가 라면 대신 자신을 위한, 그리고 누군가를 위한 푸근한 요리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봅니다.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상우의 직업 때문인지 영화 속에는 참으로 많은 소리가 들립니다. 대소리, 보리밭 위로 부는 바람 소리, 눈 내리는 소리, 산사의 풍경소리, 냇가에 물 흐르는 소리. 평소에 잊고 지냈던 자연의 소리들이 얼마나 묘하고 신비로운지 절로 깨닫게 됩니다. 사람 혹은 사랑과 달리 이 소리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선배에게 ‘어느 계절이 좋냐’는 질문을 받은 지 10년쯤 지난 지금 대답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겨울을 좋아하지만 예전보다 봄이 더 좋아졌어요. 나른하고 눈부신 봄이지만 그 계절은 매년 우리를 설레고 들뜨게 하니까요.
영화 속 메뉴 따라 하기
누군가 잘하는 요리를 물으면 라면이라 답할 것 같은 여자 은수. 여기에 라면은 그녀의 인스턴트 사랑과 생활방식을 표현해주는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하지만 자주 먹는 라면도 조금만 바꿔보면 좀더 그럴싸한 요리로 즐길 수 있답니다. 이제는 은수도 더는 외롭지 않기를. 그리고 인스턴트 사랑 대신 진득한 사랑을 찾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든든한 라면 레시피를 소개합니다. 이름하야 순두부라면!
순두부라면
재료
순두부 1컵, 라면 1봉지, 달걀 1개, 고춧가루 1작은술, 대파 조금, 팽이버섯 1/2개, 고추 1/2개
만들기
1. 순두부는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2. 대파와 고추는 어슷 썰고 팽이버섯은 깨끗이 씻어 밑동을 자른 뒤 먹기 좋은 갈래로 나눈다.
3. 냄비에 물을 넣고 가열하다가 물이 끓기 시작하면 라면스프와 고춧가루를 넣은 뒤 면을 넣고 2분가량 더 끓인다.
4. 면이 꼬들꼬들하게 익으면 순두부와 달걀을 넣고 1-2분 더 끓인다.
5. 대파와 팽이버섯, 고추 등을 넣고 마무리한다.
TIP. 순두부가 들어가면 국물이 싱거워질 수 있으니, 라면 포장지에 적힌 것보다 물의 양을 적게 잡아 끓인다.
파란달 / 요리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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