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판 감독

무려 10년 만의 귀환이다. 전작 <눈물의 왕자>(2009) 이후 오랜 시간 공백기를 가졌던 홍콩 감독 욘판이 첫 장편 애니메이션 <7번가 이야기>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반영(反英) 폭동과 시대적 변화의 물결이 당도했던 1967년 홍콩을 배경으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창작자로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고 말하는 욘판 감독은 홍콩에 바치는 러브레터이자, 스토리텔링과 예술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는 <7번가 이야기>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고국 홍콩이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7번가 이야기>의 아시안 프리미어 시사를 열게 됐다.

지금 현재 홍콩은 군중이 몰려 집회로 변모할 수 있는 모든 상황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영화 상영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게 된 건 큰 영광이었는데, 이 영광을 홍콩 시민들과 함께 누리지 못해 유감스럽다. 때가 되면 홍콩 관객들에게 꼭 이 영화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편 애니메이션 연출은 처음인데,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찍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나.

<7번가 이야기> 이전까지 1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많은 스타 배우들, 훌륭한 제작진과 작업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렸다. 그래서 지난 10년간 영화 연출을 하지 않고 오직 글쓰기에만 집중했다. 나의 정체성을 다시 발견하고, 나 자신을 재정의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랐다. 명상을 하는 시간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아름다운 말과 그림, 문학적 요소와 음악을 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합쳐 예술의 형태로 구현하기에 애니메이션이 적합하다고 봤다.

1967년 홍콩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당시 홍콩에서는 영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문학과 영화를 사랑했던 스무 살 청년이었고, 홍콩이 역사의 한 장을 통과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지켜봤다. <7번가 이야기>를 통해 내가 사랑했던 그 시절 홍콩을 추억하고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동시에 엄마와 딸로 대변되는 서로 다른 세대의 이야기를 통해 홍콩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해방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7번가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격동의 순간이 펼쳐지고 있는 도중에도 시위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로 간의 관계에 침잠한다.

나의 경험과도 맞닿아있는 설정이다. 1967년 당시 한쪽에서는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사랑을 했다. 세계가 붕괴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일상적인 삶을 살고 사랑을 한다는 건 인생의 아이러니다. 나는 이러한 지점이 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스크린에 아름답고 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준, 모든 예술가들에게 고맙다.

캐릭터를 3D로 구현한 다음 2D로 변환하는 작업을 거쳤다고 들었다. 시간과 제작비가 훨씬 많이 드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면서 이런 작업방식을 선택했던 이유는.

3D로 캐릭터를 만들게 되면 눈물이 떨어지는 모습, 시선이 움직이는 모습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느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연출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런 측면에서 3D 작업이 내게는 잘 맞았다. 하지만 2D야말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고 생각해서 수고스럽지만 변환하는 작업을 오래 거쳤다.

홍콩영화 속 인물의 움직임이 탁월하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영화는, 왕가위의 영화 이후 이 작품이 처음이다.

이 작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더라. 인물들이 천천히 움직인다는 점에서 왕가위 스타일의 슬로 모션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가 영화적 기법을 통해 슬로 모션을 구현한 반면 나는 별다른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그 시대 사람들의 여유로운 제스처를 화면에 담았을 뿐이다. 왕가위는 나의 좋은 친구이자, 유니크한 스타일을 가진 감독이다. 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아비정전>(1990)의 수록곡인 <Jungle Drums>를 이 작품에 삽입했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2019년 홍콩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의 홍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지금 현재 홍콩의 시위는 1967년의 시위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시위대는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고 하지만 나는 이들의 행동에 회의적이다. 자유를 위한 행동이 규모의 폭력과 유혈사태를 유발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홍콩의 미래를 찬탈하는 행위일 뿐이다.


장영엽 · 사진 최성열

<씨네21>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데일리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