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이>, 기어코 바꾼 것과 지독히 바뀌지 않는 것 사이에서 던지는 질문
<태일이>에는 그간 전태일 열사 관련 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인물 금화(이나영)가 나온다. 우리가 우선 주목할 대목은 금화의 등장 후 10여분간이다. 50여년 전 노동 현실과 오늘날의 사회상을 잇는 연결망이 여기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금화는 태일이(장동윤)가 짝사랑한 3살 연상의 누나로, 그가 재단사로 일한 한미사 사장(권해효)의 처제다. 실제 이름은 ‘금희’다. 평소 메모에 열심이던 전태일 열사는 한미사 재단사가 된 1967년 2월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내려갔는데 초기 한달간의 일기에 “금희 누나”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빼곡하다. 동명 원작 만화(글 박태옥, 그림 최호철)에도 금희가 등장하는 페이지만큼은 화사하게 채색돼 있다. 당시 19살이던 전태일은 불꽃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은 이후 스스로 실연을 택한 다음 아래와 같이 쓴다.
“이때까지 여자를 많이 사귀어보았지만은 진짜 그 사람만큼 나를 따르게 그리고 나를 한시도 빼놓지 않고 그를 생각하게 한 사람은 그녀 혼자뿐이다. (중략) 지금 내 현실에 사랑이 다 무엇이냐? 동심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 (1967년 2월14일 ‘전태일 일기’ 중)
그가 사랑을 포기하도록 한 “현실”은 “출세에 지장”이 있을지 모를 근심이었다. 당시 그의 입장에서 사장의 처제는 “사랑해선 안될” 상대였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 전태일이 중대한 정체성 변화를 겪었음을 짚는다. 실연의 아픔이 개인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태일의 개인적 사랑의 실패는 평화시장의 독특한 생산양식으로 인한 착취 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민중의 자기서사와 한국 노동현실의 증언-전태일의 일기·수기·편지를 중심으로’ , 오창은). 자신의 이름을 태일(泰一)에서 태일(泰壹)로 바꾸기까지 한 것도 이즈음이다. 2021년에 50여년 전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봐야 할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가 인식한 당대의 착취 구조가 그간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유지, 변형, 강화돼왔는지 살피는 일은 <태일이>가 21세기에 다시 태어난 뜻을 짚는 작업도 될 것이다.
연대를 가로막는 오래된 역사
따라서 금화 캐릭터의 등장을 그저 로맨스 요소로만 보아 넘기면 곤란해진다. 형부네 가게에서 일을 돕는 금화의 첫 등장 시퀀스. 이 장면에서 태일이는 사장으로부터 재단사 승진 제안을 받는다. 그가 계급 상승을 꿈꾸며 미싱사 일을 마다한 채 급여가 절반도 되지 않는 재단 보조를 시작한 지 반년이 안된 시점이었다. 사장의 제안은 갈등을 빚고 뛰쳐나간 재단사 신씨(박철민)의 자리를 대체하는 자리다(중반부 태일이가 사장의 눈 밖에 나자 그 역시 다른 노동자에 의해 쉽사리 대체된다). 짧은 망설임 끝에 제안을 받아들이고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은 기뻐한다. 태일이는 신씨 아저씨의 처지가 못내 걱정이지만 아버지(진선규)는 “마, 쓸데없이 남 걱정 말고 사장한테 잘 보일 생각이나 해라”라며 다그친다. 자연스러운 계급 상승 욕망이 구조화한 자본의 모순과 충돌한다.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선의의 의지가 강요된 제로섬게임의 형세와 부딪힌다. 믿을 건 가족뿐이고 계급 내 연대는 가로막힌다. 어떤 장치들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작동해왔다.
이어 태일과 금화가 본격적으로 호감을 나누는 장면이 따라붙는다. 함께 걷는 퇴근길, 카메라가 틸트다운하면 골목 바닥에 내린 가로등 불빛이 온화하다. 태일이가 사장 집에서 잠시 기거할 때 고급 소파가 놓인 거실 내부를 롱숏으로 비춘 다음, 금화에게 데이트 신청을 결심하는 태일의 눈빛으로 이어지는 배치는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또 다른 의미의 계급성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우리는 2019년에도 다른 이의 일자리를 대체한 반지하 가족이 사장 집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을 상상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2007년작인 원작 만화 <태일이>에서 이 부분을 그린 단락의 소제목은 ‘비누 향기’다. 사장 집 욕실에 있는 비누는 향부터 달랐다. 냄새가 계급을 말해주는 오래된 현실. 이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임을 깨달은 태일이가 자신의 처지를 각성한 뒤 걷는 길은 비 내리는 계단이다. 카메라 틸트다운. 골목 바닥에 고인 빗물이 음산하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평화시장의 계급 구조를 묘사하는 게 바로 이때부터다. 원작과 영화가 공들여 좇아간, 전태일 열사의 의식의 흐름이다.
그다음 이어지는 장면들은 ‘임금 배분에 따른 갈등-착취 구조’에 대한 묘사다. 사장은 이런저런 핑계로 월급을 깎는다. 신씨의 퇴사로 인한 손해는 남아 있는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당시 평화시장의 소규모 의류 공장들은 재단사-재단 보조-미싱사-미싱 보조-‘시다’(견습공)로 짜여 돌아가는 철저한 저임금 계급사회였다. 미싱사가 한달에 7천원 벌 때 시다는 평균 1500원을 받았다. 사장이 재단사에게 노동자들의 월급을 뭉뚱그려 주면 재단사는 이를 미싱사들에게 분배하고, 미싱사는 이를 보조와 시다들에게 다시 나눠준다. 급여 분배와 관리 책임을 계단식으로 떠넘기는 구조다(우리는 2015년에도 회사가 해고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본 적이 있다). 폐 질환을 앓는 미싱사를 해고했을 때 사장의 말은 “애들 해고하는 것도 원래 (재단사인) 자네 일이란 말야! 내가 알아서 해준 걸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이다. 전태일 열사가 본능적으로 끊어내려 한 것이 이 괴상한 계급 사슬이었다.
50여년을 아우르는 화면
복층 구조로 불법 개조한 영화 속 공장 내부 풍경에서 재단 파트는 위층에, 미싱 파트는 아래층에 배치됐다. 각본을 쓴 심형섭 작가에게 뜻을 물었다. “수직과 수평 이미지로 녹여내고자 한 부분이 있다. 평화시장 내부 긴 복도의 깊이와 청계고가의 높이가 대비되는 식이다”라며 “애초 시나리오에는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을 향해 올라가는 장면도 있었다”라고 했다. 수직 상승하는 시대 이미지와 인물들의 처지를 중첩시키기 위해서였다. 열사가 쏘아올린 질문은 이렇게 <태일이>의 화면을 통해 지난 50여년을 가로지르는 화두가 된다. 경제가 이만큼이나 성장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졌나. 누군가의 상승 와중에 누군가의 추락과 그보다도 많은 이들의 불안은 어디에 축적되었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줄어든 월급을 받아든 시다가 미싱사에게 항의한다. “너무 적지 않나요?” “그걸 왜 나한테 따지니? 재단사한테 따져야지.” “제 월급은 언니가 주는 거잖아요.” 1995년작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선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을들의 갈등’이다. 을 밑에 병이 있고 그 밑에 정이 있으며 그들이 갈등을 빚는 동안 갑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21세기 원작과 영화에서 강조된다. 이는 지난 50년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 지난 20여년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한국이 IMF 이후 세계 10위권 안팎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는 동안 노동자들이 하루 평균 3명꼴로 끼여 죽고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치여 죽기까지, 이같은 하청-재하청에 보호받지 못하는 특수 고용직 양산 구조가 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급여가 줄어도 사장에게 이를 따지면 곧바로 대체된다. 미싱사는 태일에게 항의한다. “재단사면 재단사가 할 책임을 다해야 재단사인 거야. 시다들 풀빵 사주고 청소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노동 조건은 둘째 문제다. 우선 돈을 벌어야 남성 형제의 학비를 대고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 15시간 노동에 식사 시간 30분, 잠 쫓는 각성제와 몸 밖으로 배출되지 않는 섬유 먼지를 함께 마시더라도 사장에게 돈을 더 받아내는 것이 재단사가 할 일이라는 것이다. 절박함에 따른 을들의 갈등이 표면화할수록 갑은 수면 아래로 책임을 숨기기가 용이해진다. 심형섭 작가는 이에 대해 “요즘도 느끼지만 을과 을끼리 싸우게 만드는 시스템이 그 당시에도 원시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노동자가 스스로를 학대하며 이 시스템을 내면화하는 면이 있다고 봤다”고 핵심을 짚어줬다. <태일이>는 이 장면 이후 한층 더 깊이 자본주의의 본질로 파고들면서 그 보편적 모순과 당대의 특수성을 정교히 박음질한다. 다음의 대사를 보자.
일반 모순과 특수 모순
“기계는 사람 말 잘 못 알아묵어. 그러니께 요놈들 비위를 다 맞춰줘야 한다 이 말여.” 재단사 신씨가 태일이를 가르치며 하는 말이다. 사람 위에 기계 있고 기계를 위해 사람이 갈려나간다. 자본이 사람을 압도하고 사람은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속이다. 오늘날 디지털 자본주의에선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자본가를 대신해 플랫폼 노동자들을 지휘하며, 노동자는 쉽게 진입하고 더 쉽게 대체된다. 착취 구조는 알고리즘 뒤에 숨는다. 전태일 열사의 일기에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와 그로 인한 노동 소외를 몸으로 겪어낸 통찰이 보인다. <메트로폴리스>(감독 프리츠 랑, 1927)나 <모던 타임즈>(감독 찰리 채플린, 1936)의 앞부분을 글로 옮기는 공모전이 있다면 당선될 만한 문장들이다.
“어지럽게 들려오는 쇳소리, 짜증 섞인 미싱사들의 소리, 무엇이 진짜인지 모른 채로 그 속에 나도 묻혀간다. 내가 하는 일 외에는 무아지경…. 내가 없다. 일의 순서대로 순간마다 해야 할 행동만이 질서정연하게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나는 내 일의 방관자, 내 육신은 일을 하지만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공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1967년 3월 ‘전태일 일기’ 중)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중, 전태일)
시스템 속 일원으로서의 고뇌
스무살도 되지 않은 당시 전태일이 이처럼 스스로에 대한 메타 인지에 능했던 사실은 <태일이>를 그저 사건의 재현에만 머물지 않게 한 토대다. 그의 일기 곳곳에는 “전체의 일부”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젊은 철학자로서 그의 세계관이 응축된 말로 보인다. “방관자”라는 말도 눈에 띈다. 내가 받는 핍박이 동료의 핍박이었고 동료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었던 그의 고뇌가 담긴 것임은 물론이다. 여기에 그토록 억압적인 시스템의 일원으로 사태를 바라보려는 그의 시선은, 노동자 입장에서 상대방에 맞서고 투쟁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인문정치와 주체>(대안지식연구회)에서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같은 전태일의 초월성에 주목한다. “전태일처럼 규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남, 즉 ‘탈정체화’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출발”이며, 그의 분신 항거가 ‘열사 정신’을 넘어 “다른 정치의 가능성”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재단사라는 중간자로서의 정체성은 물론 노동자 한쪽의 입장을 초월해 ‘전체’를 보고 행동했다. 그저 생존하기 위해 악하지 않은 의지로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모인 결과 결코 선하지 못한 시스템을 이루며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일원들에게, 그의 이같은 탈정체화는 외면해선 안될 화두가 된다.
또한 <태일이>는 그가 끝내 바꿔낸 것과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것들 사이에 우리를 데려다놓고는, 지금은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보여주며 눈물 짓게 만든다. “제 월급은 언니가 주는 거”라던 시다가 그 언니의 약값을 모금하는 상자에 동전을 넣을 때, 그 돈을 받게 된 미싱사가 “왜 시다들한테까지 돈을 걷어”라며 미안해할 때, 그 순간 시다들 나이의 어린 동생들이 집에서 먹을 걸 찾을 때, <태일이>는 한 사람의 전기(傳記)를 넘어서는 공동체의 울림이 된다. 모두가 아는 결말. 태일의 몸에 불이 붙은 장면은 영화에서 단 두숏만으로 처리된다. 이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반응 숏들이 한결 길게 연출돼 있다. 이들의 표정은 ‘전체의 일부’로서 관객 자신의 얼굴이 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재난을 지켜보고 있나.
세상이 나빠졌다고 말한 적 없다
최근 몇해 사이 널리 읽힌 책 <팩트풀니스>(한스 로슬링 외)는 화제성만큼이나 부수적 역효과가 커 보인다.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묻고 정답(거의 절반으로 줄었다)을 맞히는 비율이 극히 낮더라는 식인데, 이 책에는 ‘오늘날 상위 부자 1%는 전세계 자산의 몇%를 차지하고 있을까’(정답 37.8%)와 같이 다수의 평소 인식과 맞아떨어지거나 부정적 인식이 정답인 문제는 나오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선입견에 따라 틀리기 쉬운 문제들을 잔뜩 모아놓고는 ‘당신은 세상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지적 충격을 안기는 방식이다. 사실에 충실한 태도를 중시하는 고학력자들이 여기에 잘도 반응하는데, ‘밥 굶고 고문 당하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은 얼마나 살 만한가’를 강조하는 지식인도 있다. 책을 잘못 읽으셨다. <팩트풀니스>는 “발전을 축하하는 것과 더 큰 발전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은 상충하지 않는다”며 투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역사를 현재와의 대화 상대가 아닌 단순 비교 대상으로 삼는 순간 현재의 고통에 무감해진다. 성차별을 말할 때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취급받던 시절을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현재의 절박함을 한가함으로 바꿔버린다. 아동권을 말할 때 아동노동이 횡행하던 시대의 얘기를 꺼내드는 순간 아이들의 아픔은 사회의 공감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진다. <태일이>를 보며 그 시절과 지금을 단순 비교하기보다 그간 고도화한 착취 구조를 발견하는 관객이 되는 일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열사의 당부에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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