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듣기 싫어도 들릴 만큼 보편화된 말인 만큼, 이 단어가 일본어 '오타쿠(オタク)'에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국에 수입된 '오타쿠'가 '덕후'로 변화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입장에서는,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위상이 올라간 말이기도 하다.
'오타쿠'는 애초부터 특정 집단의 불쾌한 면모를 가리키기 위해 만든 멸칭이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 컬처에 천착하고, 남들이 모르는 것에 탐닉하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자의든 타의든 사회적 소통 없이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이들이었다. 일본어 '오타쿠'는 우리말로 '댁' 정도의 의미를 가진 2인칭 대명사가 본래의 쓰임이다. 평범한 일상적 대화에서 상대를 부를 때 웬만해선 나오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1970~80년대의 원조 오타쿠들은 자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이 같이 부자연스러운 호칭을 사용하며 세상과 과도한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다(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해당 집단의 대화 풍경을 관찰한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가 이들을 '오타쿠'라 부르며 수면 위로 올렸다는 것이 단어 유래의 정설이다.
이후 오타쿠들이 일으킨 범죄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 이미지는 나쁘게 유지됐다. 좋아질 이유도 없었다.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오타쿠 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한국도 비슷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대사를 주워 섬기며 한쪽 팔에 흑염룡을 사육 중인 사람의 호감도가 평균을 밑도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2000년대 초반에는 다음 카페와 웹 하드를 중심으로 일본 드라마나 아이돌이 소소하게 유행했던 적도 있었다. 이때 온라인 상에선 '오타쿠'란 단어에 '오덕후', '다섯 개의 덕이 어쩌고' 하는 의미를 붙이며 순화하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일본 문화에 국한된 소수 취향의 반사회적 향유자였던 오타쿠의 지위가 격상된 건, 이들이 소비 집단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원산지 일본에선 오타쿠의 전유물들이 대중적으로도 히트하며 문화에 있어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또한 인터넷 보편화로 취향 선택지가 늘어나고, 문화 콘텐츠 흐름은 소품종 대량 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바뀌었다. 어떤 문화의 애호가라면 스스로를 '오타쿠'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철도 오타쿠, 사진 오타쿠, 패션 오타쿠, 책 오타쿠, 아이돌 오타쿠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취미 만큼의 오타쿠들이 등장했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점잖고 우아한 표현들 대신 왜 '오타쿠', '덕후'라는 말이 보급됐을까? 이는 취미 생활의 발전과 사회가 공유하는 '멀쩡한 삶'에 대한 함의 변화의 속도가 맞지 않아서 나타난 현상으로 풀이된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인쇄된 대형 베개와 결혼할 결심을 않더라도 무언가에 열광하는 스스로를 '덕후'라 칭하게 됐지만, 취미 활동이 건전성과 유리돼 있다는 환상을 아직 품고 있다. 이는 곧 일, 자기개발 혹은 계발, 가족 및 친구와 같이 시간과 애정과 열정을 할애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상적 요소들의 반대편에 '덕후질'이 있다는 무의식적 믿음이다. 거기서 오는 자조를 품은 단어는 우선 극동아시아에선 '오타쿠' 만한 것이 없다. 한국에선 바(Bar)에서 일하는 여성을 낮잡아 부르던 '빠순이'가 아이돌 팬들을 비하하는 '빠순이'로 바뀌고, '빠순이'가 있으니 '빠돌이'가 만들어지며 '빠'가 '덕후'와 유사한 형태의 접미어로 변했지만 다소 상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약 30년 경력의 덕후로서 영화 <성덕>을 본 후 이 같은 역사(?)들이 머릿 속 파노라마로 펼쳐진 건 그 안에 지금, 여기의 덕후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감독이자 메인 화자인 오세연은 지금은 연예계에서 퇴출된 정준영의 덕후였다. 나아가 그는 자신을 '성덕', '성공한 덕후'였다고 설명한다. 하도 스케줄에 얼굴을 비추는 바람에 정준영도 알아본 팬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한때 모든 걸 쏟아 붓다시피 했던 연예인의 추락을 목격한, 덕후'였던' 자들의 입장들을 전한다. 그러면서 사회부적응자나 현실도피자의 탐닉에 불과했던 '덕후질'의 기반에 평범한 애정과 열정이 존재함을 공론화한다. 또 오늘의 덕후들은 무지성으로 덕질 대상의 결함을 덮으려 하는 비이성적 집단이 아님을 선언한다. 이건 현 시점에서 크게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덕질' 대상이 성범죄자로 국한되며 에피소드는 필요했던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영화의 구성은 매우 단조롭다. 정준영, 승리, 가을방학 멤버였던 정바비 등을 사랑했던 덕후들이 저마다의 배신감을 토로하거나 모았던 팬 물품들에 서린 추억들을 공유하고, 또 그 강제 변질을 함께 분노한다. 이 비슷한 장면들의 연쇄가 피로감을 안기는 사이, 카메라는 아직도 덕질 대상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덕후들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복권 집회 체험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풍경이 꽤 긴 시간 삽입되는데, 그 순간 <성덕>의 주제의식은 현실을 과도하게 머금으며 길을 잃고 만다. 오빠가 사회면에 등장하는 바람에 탈덕한 덕후의 시선으로 아직도 덕질하는 덕후를 이 같은 방식으로 비유하는 배경에 계몽 욕구가 먼저 포착된다.
아마 2010년이었던 것 같다. 당시 경력 20년을 바라보던 수준의 덕후였던 나는 사회 통합 증진과 관련한 논문 공모전을 발견했다. 논문을 내기로 마음 먹으며 정한 주제는 덕후들이 받는 핍박(?)의 현황과 타파 방안이었다. 덕후로서 겪은 모진 고난도 주제 선정 이유였지만, 덕후가 일반적 의미의 '정상'임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바탕에 있었던 것을 부정할 길이 없다. 주변의 모든 덕후와 비덕후를 모아, 오세연 감독처럼 인터뷰를 했다. 거의 20명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다섯 명 정도 인터뷰를 마쳤을 때 이 논문이 망했음을 직감했다. 전제 자체가 잘못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덕후를 '정상 범위'에 넣어야 한다거나, 통합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 내릴 수 없어 억지로 끝낸 논문과 <성덕>의 황급한 결말이 겹쳐 보였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 거기에 돈과 시간과 체력을 쏟는 행위는 이해와 인정의 영역이 아니다. 그냥 행위와 행위자가 존재할 따름이다. 행위자가 점잖은 '애호가' 대신 자조의 의미가 담긴 '오타쿠'라고 자신을 칭하든 말든, 그는 다만 존재한다.
<성덕>에 등장하는 오늘의 덕후들은 사랑해서 상처 받았다. 그리고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면서도 또 다시 사랑을 한다. 그건 차마 자신을 덕후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에너지의 발산이고 중독적 경험이다. 영화 속 탈덕한 덕후들에게 남은 건 '내가 저런 인간 배를 불렸다'는 자책감과 똥값이 된 굿즈들이 아니라, 덕질하던 순간의 자신이 모여 완성된 현재의 자신이었다. 그리고 서툰 만듦새로나마 이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낸 것이야말로 <성덕>이 다 한 제 몫이었다.
칼럼니스트 라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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