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린이 재해석한 '신데렐라 아닌 신데렐라'의 의의, '브리저튼4' 소피 역 하예린의 말들

〈브리저튼4〉
〈브리저튼4〉

이 신데렐라는 확고한 도덕적 나침반을 품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 시즌4(이하〈브리저튼4〉)의 ‘소피 백’(하예린) 이야기다. ‘베네딕트’(루크 톰슨)는 소피를 사랑해 그에게 자신의 ‘정부’가 될 것을 제안한다. 소피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가장 되기 싫은 게 나리의 정부라는 것도 모르시죠?”라며. 그리고 소피는 덧붙인다. “저의 도덕과 존엄과 자존심을 버리라 말씀하신 겁니다. 평생 결혼 못 하는 포장된 창부로 살라고요. 고귀한 신분은 못 되어도 그런 바닥 인생은 거절합니다. 하녀로서의 저는 남부끄럽지 않고 필요한 사람인데, 그 자리를 강탈하려 하십니까? 뭘 위해서요?”

19세기 영국 상류사회를 뒤흔든 스캔들과 로맨스를 다루는 시리즈 〈브리저튼〉은 시즌4에 이르러 처음으로 하인들의 세계를 조명했다. 하녀인 소피는 상류사회의 베네딕트 브리저튼과 사랑에 빠지지만, 이 새로운 신데렐라는 ‘왕자’의 손을 덥석 잡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꾸느니, 남부끄럽지 않은 유능한 하녀로 살길 택한다.

하예린이 재해석한 신데렐라는 곤경에 빠진 평범한 여성이 아니며, 유능하고 회복력이 뛰어난 전략가이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인물이다. 이를테면 7년간 임금을 한 푼도 주지 않은 고용주에게 쫓겨나면서 다이아몬드 구두 장식을 훔쳐 나서는 식이다. 하예린은 소피에게 진지함과 무게를,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그러나 결코 우악스럽지 않은, 교양과 우아함, 그리고 품위를 부여했다.

소피 백 역을 맡은 하예린은 넷플릭스 시리즈 〈서바이버스〉, 드라마 〈헤일로〉에서 활약하며 주목받은 한국계 호주인 배우로, 〈브리저튼〉 시리즈 사상 최초로 주연을 맡은 동아시아계 배우이기도 하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에 위치한 커뮤니티 하우스 마실 3층 라이브홀에서는 〈브리저튼4〉의 배우 하예린이 국내 취재진의 질의에 응답하는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이날 하예린은 〈브리저튼4〉 비하인드부터 할리우드 배우로서 활동하고 있는 소감을 한국어와 영어를 오가며 진솔하게 밝혔다. 마치 소피처럼 단단하고 뚝심 있어 보였던 배우 하예린이 전한 말, 말, 말을 옮긴다.


〈브리저튼4〉
〈브리저튼4〉

하예린이 뒤엎은 신데렐라, “소피는 신데렐라가 아니다…구원의 손을 내밀어도 즉각 잡지 않는 인물”

〈브리저튼4〉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완전히 뒤집어냈다. 시리즈는 결혼에 무심한 자유로운 영혼 베네딕트 브리저튼이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은빛 드레스의 여인’과 현실의 하녀 소피 사이에서 사랑과 정체성, 계급의 경계를 넘나드는 로맨스를 담았지만, 하예린은 “〈브리저튼4〉의 1회 빼고는 신데렐라 스토리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 못 박았다. 하예린은 “신데렐라는 왕자가 손을 내밀었을 때 주저 없이 바로 잡는다. 그런데 소피는 베네딕트가 구원의 손을 내밀어도 즉각 잡지 않는다. 〈브리저튼4〉는 ‘상대방이 과연 진실로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이야기다. 계층이나 외모, 사회적 지위를 다 벗어나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그 사랑을 쟁취하려는 이야기다”라며 “누군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사회가 가로막더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울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브리저튼4〉를 요약했다.

더불어 하예린은 “소피는 위트 있고, 지능이 뛰어난 하녀다. 겉모습은 굉장히 강한데, 안에는 연약한 이중성(duality)이 있다. 그래서 연기하기에 재미있었다”라며 캐릭터를 연기한 소감에 대해 전했다. 자신과 소피의 닮은 점에 관해서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밝히게 될 것 같아서 주저된다"면서도 “재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내면의 도덕적인 기준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 비슷하다. 약점 쪽으로 가보자면, 나도 자신감이 좀 부족한 편이다. 오늘날의 사회 기준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인가, 이런 고민을 나도 해봤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나 아픔이 성인이 될 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소피와 나의 공통점인 것 같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배우 하예린(사진제공=넷플릭스)
배우 하예린(사진제공=넷플릭스)

감격스러웠던 캐스팅의 순간, “어머니와 강남 한복판에서 눈물 흘리며 소리 질러”

하예린은 이날 〈브리저튼4〉에 합류하게 된 과정에 관해서도 털어놓았다. 하예린은 〈브리저튼4〉 오디션 제안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태안에 있었다. 롯데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는데 에이전트에게 〈브리저튼〉에 대해 아냐는 전화가 왔다. ‘당연히 알지!’라고 답했다. 그래서 〈브리저튼4〉의 두 장면을 찍은 셀프 테이프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하예린은 “당연히 답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줌으로 미팅하자는 이메일을 받아 제작진과 미팅을 했다. 그리고 이후에, 한국 시간으로 밤 11시에 베네딕트 역의 루크 톰슨과 케미스트리 리드(테스트)를 했다”고 오디션 과정에 대해 전했다. 하예린은 “이후 강남에서 어머니와 밥을 먹고 있는데, 합격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같이 눈물 흘리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저 여자 괜찮아?’라는 표정으로 봤다”고 감격스러웠던 캐스팅의 순간을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루크 톰슨과 케미스트리 리드를 했을 때는 연기가 잘 흐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나보다 더욱 예쁘고, 재능도 실력도 더 좋은 배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루크의 말로는, 바로 느낌이 왔다고 하더라”며 하예린 자신은 〈브리저튼4〉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배우 하예린(사진제공=넷플릭스)
배우 하예린(사진제공=넷플릭스)

한국계 배우로 할리우드에서 사는 일, ‘소피 베켓’에서 ‘소피 백’으로, 그리고 여전히 ‘하예린’으로

〈브리저튼4〉의 원작 소설에서 소피의 성은 ‘베켓’이었으나, 하예린이 소피 역으로 낙점된 이후 소피의 성이 한국식 성인 ‘백’으로 바뀌었다. 하예린은 “합격 통보 후에 제작진과 미팅을 하다가, ‘한국 성씨에서 ‘베켓’과 비슷한 것이 있냐’라는 얘기가 나왔다. '백'이 영어로 쓰면 B로 시작하고, 원래 이름 베켓이랑 비슷한 소리이기 때문에, ‘소피 백’으로 쉽게 정해졌다. 나는 그게 속 시원했다. 한국 배우이기도 하니까 내 정체성에 맞는 성으로 바꾼다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다. 역할이 나에게 맞춰지는 느낌이 들어서 되게 고마웠다”라고 성을 변경하게 된 과정에 대해 밝혔다.

하예린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지만 특별한 영어 이름을 짓는 대신 본인의 한국 이름인 ‘하예린’ 혹은 ‘예린 하’라는 이름을 줄곧 사용한다. 하예린은 그 이유에 대해 “(호주에서 살 때) 어렸을 때부터 쭉 ‘예린’으로 살았다. 지금 뒤돌아보면, 어머니가 다른 영어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셔서 너무 감사하다”며 “오히려 ‘하예린’이라는 이름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신감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고 전했다.

더불어 할리우드에서 동양계 배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고 느끼냐는 질문에 하예린은 “변화는 분명히 있다고 느낀다. 특히 태도에서다. 유색인종 배우들을 어떻게 대하고 대화하는지, 그 태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공평하고 평등해졌다. 그 변화를 처음 느꼈던 건 오디션 기회 자체가 많아진 것이다. 꼭 주연이 아니더라도, 동양인 배우들에게 오디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분명한 변화다”라고 답했다.


〈브리저튼4〉
〈브리저튼4〉

〈브리저튼〉 시리즈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브리저튼〉은 피부색으로 판단하지 않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사회”

〈브리저튼〉은 다양한 인종을 캐스팅해 호평받은 시리즈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하예린은 “〈브리저튼〉은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모습 그대로를 굉장히 잘 반영한다”며 “나는 그런 모습(다양한 인종이 등장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다고 느낀다. 아마 나는 호주와 미국 등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하예린은 “다양한 인종과 성적 취향,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 세계 관객의 마음에 닿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며 〈브리저튼〉 시리즈에 대해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전했다.

더불어 하예린은 “〈브리저튼〉이 너무 잘하는 것이 피부색이나 외적인 요인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사회를 그리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의 사회 모습이다. 작품의 핵심 정신이라면, 우리 모두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에 있어서 어떤 것도 우리를 분리시키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게 작품 자체에도, 현장에도 흐르고 있었다”며 다양성 측면에서의 〈브리저튼〉 시리즈의 의의를 전했다.


배우 하예린(사진제공=넷플릭스)
배우 하예린(사진제공=넷플릭스)

노출 장면에 대한 고백과 소신,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필수적인 역할”

〈브리저튼〉 시리즈는 다양한 인종적 구성만큼이나 다양한 섹슈얼리티와 사랑의 방식을 탐구한다. 하예린은 〈브리저튼4〉 속 노출 장면에 대해 “부담이 엄청 컸다. 미디어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비판이 엄청나지 않나. 특히 한국에서는 서구 세계 대비 미의 기준이 더 엄격한 면도 있고. 나도 그동안 나 자신과 내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가 있었던 것 같다”며 고민이 많았던 준비 기간에 대해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다행히 〈브리저튼4〉에서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이제는 이 업계에서 정말 필수적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수위 있는 장면들을 마치 하나의 안무처럼 짜주셨을 뿐만 아니라, 배우들과 현장 스태프 모두가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셨다. 그 안전함 속에서 가장 최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촬영의 경험과 소신을 밝혔다.


배우 하예린(사진제공=넷플릭스)
배우 하예린(사진제공=넷플릭스)

‘손숙의 손녀’에서부터 글로벌 배우가 되기까지… “때로는 가면 증후군을 겪는다”

하예린은 원로배우 손숙의 손녀이기도 하다. 이날 하예린은 “어렸을 때, 1년에 한 번 정도 한국에 와서 할머니의 연극을 봤다. 그때 할머니가 하신 1인극을 보고, 인간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이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손숙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하예린은 “할머니(손숙)가 〈브리저튼4〉을 다 보시고 자랑스럽다고 하셨다”며 “오늘 아침에도 할머니를 뵀는데, 예전에는 ‘손숙의 손녀 하예린’이었다면, 이제는 ‘하예린의 할머니 손숙’이라고 하시더라”라며 좌중에 웃음을 안겼다.

하예린은 이전에 동양을 대표하는 글로벌 배우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날 하예린은 “솔직히 때로는 임포스터 신드롬(가면 증후군)을 겪기도 하고, 이 자리에 온 게 순전히 운 때문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느낀다. 그 운이 과연 언제 다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며 배우로 살아가는 자신의 심경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하예린은 “그런데 이런 자리에 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굉장한 책임감을 느낀다.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을 대변하는 일에 있어서 갈 길이 아직 멀다고 생각하고, 변화가 필요한 곳에서 변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고 자신의 마음가짐에 대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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