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장 가까운 친구는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이 확정되고 철거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부터, 친구는 있는 힘껏 시간을 쪼개어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를 찾곤 했다. 봄의 꽃들을, 여름의 초록을,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을 사진에 절박하게 담았다.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놀이터의 미끄럼틀을 어루만지고, 상가 건물 외벽을 쓰다듬었다. 친구를 따라 방문해 본 둔촌주공아파트는 과연 그 질감이 남달랐다. 나 또한 대단지 아파트에서 유년을 보냈지만, 울창한 숲인 양 곳곳에 듬직한 가로수들이 서 있고 푸른 초지가 조성되어 있는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는 그 품이 유달리 넓고 포근해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이제 더는 둔촌주공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유년을 보냈던 너른 품의 공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친구는 못내 안타까워했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권과 이해관계와 오래된 건축물의 안전 여부 등등이 모두 얽혀서 결정된 재건축이지만, 친구에게 그 재건축은 고향이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수령이 수십 년을 넘긴 나무들은 모두 뽑히거나 베어져 나갔고, 친구가 계단을 오르내리며 자랐던 아파트들은 차례로 철거되었다. 친구는 영화 〈집의 시간들〉(2017)이 〈안녕,둔촌X가정방문〉이라는 프로젝트명으로 제작비 크라우드 펀딩을 할 때 투자자로 참여했고,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내부 시사회를 다녀오고는 아스라한 슬픔에 잠겨 어쩔 줄 몰라 했다.
고향이 사라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아무리 거푸 방문하고 사진에 담고 쓰다듬고 기록영상을 본다고 해서 그 아쉬움이 다 채워지지 않는 것. 함께 웃고 울었던 이웃이 있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 공간에 깃든 기억이 그 거처를 잃고 흩어지는 것. 난 절박하게 둔촌주공을 찾던 친구를 보며 마치 댐 건설을 위해 수몰되어 사라질 예정인 고향마을을 찾는 도시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비유에 친구는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크게 다르지 않지. 실제로 재건축 때문에 완전히 사라질 동네니까. 나는 둔촌주공보다 아주 조금 더 늦게 지어진, 그래서 재건축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 중인 내 유년의 아파트 단지를 떠올렸다. 어쩌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모두 언젠가 고향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영화 〈가가린〉(2020)을 보며 친구를 떠올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1960년대 초 파리 외곽 도시 ‘이브리쉬르쉔’에 지어진 대단위 공공주택단지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우주를 비행한 구 소련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딴 건물이다. 노동자 집단 거주 지역이었던 이브리쉬르쉔은 프랑스 공산당의 지지세가 높은 지역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과 발맞춰 노동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이들을 위한 대단위 주택단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질 좋은 주거를 보장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 건설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었던 프랑스 공산당은, 새롭게 건설한 대단위 공공주택단지에 사회주의 영웅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까 그 공간은 노동자 계급의 희망이자 이상이었고 연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1960년대부터 진행된 파리 지역의 탈산업화 흐름을 막지 못했다. 대단위 공장들이 모두 지방으로 이전하고 수도 파리가 3차 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브리쉬르쉔 거주자의 상당수는 실직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70년대 들어 프랑스 공산당은 세를 잃었고, 가가린 주택단지는 더 저렴한 주거공간을 찾던 이민자들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오래된 아파트들이 그렇듯 가가린 주택단지는 점점 더 낡아져만 갔다. 재건축 논의가 진행될 무렵, 사람들의 의견은 어디서나 그렇듯 엇갈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건물의 역사적 의의와 그 공간에 대한 정서적 애착을 이야기하며 가가린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재산권을 이야기하고 부서져가는 가가린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영화 〈가가린〉은 전자의 입장에 선 소년 ‘유리’(알세니 바틸리)를 주인공으로 세운 작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재혼한 어머니의 곁을 떠나 혼자 가가린 주택단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10대 소년 유리는, 어떻게 해서든 가가린을 지키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한다. 안전진단을 통과하기 위해 시 법령을 뒤져가며 건물 곳곳을 보수한다. 전구가 나간 등을 체크해 전구를 갈고, 엘리베이터를 점검하고, 벽에 페인트칠을 하는 모든 과정을 자비로 해나간다. 가가린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모두 가가린에 정서적 애착이 있지만, 가족 없이 혼자 살아가는 유리에게 가가린은 집이자 가족이고 고향이며 온 우주나 다름없다.
하지만 10대 소년 한 명이 모든 것을 보수하고 가꾸기엔 가가린은 지나치게 거대한 단지다. 더구나 이 건물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사정도 무시할 수는 없다. 결국 가가린은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하고, 유리의 몸부림에도 철거 예정일은 하루하루 다가온다. 유리의 세계를 채우던 이웃들은 하나둘씩 가가린을 떠나고, 혼자 남은 유리는 철거 직전의 드넓은 가가린을 돌아다닌다. 언젠가 이 좁은 지구를 떠나 우주를 유영하겠다는 우주비행사의 꿈을 품고 있는 유리는, 정작 가가린을 떠나지 못한다. 여기가 아니면 갈 곳도 마땅치 않으니까.
우주비행사의 이름을 딴 단지에서 살던, 우주비행사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지닌, 우주비행사가 되는 걸 꿈꾸던 소년은, 자신의 우주가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혼자만의 시적 투쟁에 나선다. 유리는 집과 집 사이의 벽을 뚫어 통로를 내고, 사람들이 두고 간 가재도구들을 개조해 우주선 내부를 흉내 낸 구조물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자신의 온 우주가 되어준 가가린이 부서져 내릴 거라면, 차라리 가가린을 우주정거장으로 개조해 승천하겠다는,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혼자만의 투쟁. 하지만 누가 그를 비웃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어설프게나마 압도적인 구조물을 만들어내며 그 공간의 주인됨을 선언하는 유리의 투쟁은 너무 아름다워서 더 서글프다. 예정된 철거를 막을 수 없을 걸 알면서도, 영화를 보다보면 유리가 우주를 유영하는 판타지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가가린 주택단지는 2019년 철거를 시작했다. 16개월에 걸친 철거가 마무리된 그 자리에는 새로운 주택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새롭게 지어진 주택단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저마다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겠지. 하지만 유리의 우주를 채워주었던 그 많은 이웃들, 가가린 주택단지에서 함께 가난을 견디고 함께 노후화된 건물을 견디던 사람들 사이의 연대는 다시 입주하기 힘들 것이다. 대부분의 재개발은 그런 식이니까. 마치, 둔촌주공이 사라진 자리에 그 무엇이 들어선다 한들 내 친구의 고향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기억은 다 어디로 흩어지는 걸까. 한때 우리의 온 우주가 되어주었던 그 많은 고향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끊임없이 부수고 새로 짓기를 반복하는, 그래서 매일매일 누군가의 고향이 시간 너머로 수몰되는 도시에서 살고 있는 나는, 우리의 기억이 어디로 흩어져 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절박하게 SOS 신호를 보내던 유리의 기억은, 너무도 간절하게 둔촌주공을 방문해서 건물의 외벽을 쓰다듬다 오던 내 친구의 기억은, 어느 우주를 떠돌고 있을까.
이승한 TV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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