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이 세 글자을 읽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누군가는 정장을 입은 영국 신사를, 누군가는 허리춤에 줄을 맨 채 낙하하는 톰 크루즈를, 누군가는 방 안에서 스탠드 하나에 의지한 채 자료를 뒤적이는 이를 떠올릴 겁니다. 도대체 영화 속 스파이들은 어떻게 변신을 해왔던 걸까요?

# 스파이 영화의 뿌리

일각에선 '트로이의 목마'를 스파이의 원형으로 지목하기도 합니다. 고대 중국의 손자병법에도 간첩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스파이는 고대부터 있었을 거란 얘기죠. 그 긴 역사를 영화에만 한정한다면 최초의 스파이 영화는 프리츠 랑 감독의 <스파이>일 겁니다. 제목부터 스파이니 말할 것도 없이 주인공도 스파이죠. 암살과 위장, 그리고 로맨스가 얽힌 이 영화는 프리츠 랑답게 독특한 연출로 스파이의 심리 상태를 드러냅니다. 한동안 필름이 분실됐었으나 2003년에 발견되면서 간신히 복원됐습니다.

스파이

감독 프리츠 랑

출연 루돌프 클라인-로그

개봉 1928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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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계단>
39 계단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연 로버트 도냇, 매들린 캐롤

개봉 1935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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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일하는 '스파이'를 상업영화로 끌어올린 감독은 알프레드 히치콕입니다. 서스펜스의 거장인 히치콕은 평범한 사람에게 '스파이'란 누명을 씌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위기감을 조성했습니다. 존 버컨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39계단>은 한 남자가 어느 여성이 살해당하기 직전에 자신을 스파이로 오해하고 남긴 암호를 따라가는 이야기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조지 케플란이란 첩보요원으로 오해받는 로저 손힐의 이야기를 담았죠. 폴 뉴먼이 출연한 후기작 <찢어진 커튼>도 첩보전에 끼어든 물리학자를 주인공으로 하고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연 캐리 그랜트, 에바 마리 세인트, 제임스 메이슨

개봉 1959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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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적인 스파이, 현실적인 스파이

스파이를 소재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형식으로 승화시킨 건 당연히 '007' 시리즈입니다. 제임스 본드는 작가 이안 플레밍이 영국 해군 정보기관에서 일하면서 쌓은 첩보 관련 지식과 그가 사랑한 탐정소설의 산물이었습니다. 소설 시리즈가 발간된 지 10년 후인 1962, 숀 코네리 주연의 <007 살인번호>가 공개됐고 지금까지 55년간 24편의 영화로 이어지며 사랑받는 시리즈이자 첩보영화의 원형으로 등극합니다.

<007 살인번호>
007 살인번호

감독 테렌스 영

출연 숀 코네리

개봉 1962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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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시리즈는 엄청난 인기 속에 첩보영화의 전형적인 틀을 만듭니다. 정장 차림의 세련된 스타일의 첩보요원,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기보다 능수능란한 말솜씨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는 재치, 기상천외한 온갖 장비들, 그리고 그와 함께 활약하는 여성 파트너 등이 007 시리즈가 세운 기조입니다.

007 시리즈의 전매특허인 '본드걸'과 Q(데스몬드 레웰인)의 '가젯'

이에 반발하듯 에스피오나지 영화가 등장합니다. 에스피오나지(Espionage) 첩보 행위를 뜻하는 불어인데요, 007 시리즈의 인기로 지나치게 판타지화된 첩보 장르 속에서 보다 현실적인 첩보 활동과 심리적 긴장감을 부각한 작품들을 이르는 용어로 정착합니다. <007 살인번호> 개봉 이후 3년 만에 등장한 에스피오나지 영화는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입니다.   

실제 첩보요원으로 활동한 존 르 카레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첩보 소설을 집필했습니다. 그의 세 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좋은 반응을 얻으며 영화로 제작됐죠.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는 임무를 위해 자신의 일상까지 위장하는 첩보원이 주인공입니다. 어떻게든 상대를 속여 임무를 달성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서로 불신하는 냉전 시대의 분위기가 사방에서 드러납니다. 의도적으로 흑백으로 촬영한 영상은 비정한 스파이 세계를 또렷하게 담아내죠.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감독 마틴 리트

출연 리차드 버튼, 클레어 블룸, 오스카 베르너

개봉 1965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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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시리즈 같은 '블록버스터 첩보물'이나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같은 에스피오나지 장르 모두 '냉전'을 바탕으로 무럭무럭 성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는 진영 간의 군비경쟁, 우주 경쟁 같은 '몸집 키우기',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보 전쟁을 은밀하게 벌입니다. 몇 십 년간 지속된 냉전 시대에는 적진으로 침투해 기밀을 획득하는 첩보전이 실제로도 빈번했죠.

미국에서 최초로 간첩협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로젠버그 부부 / 영국 정보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던 소련 스파이 킴 필비

냉전 시대에 대한 대중들의 불안감이 007 같은 첩보 장르와 결합돼 1960~70년대 대중문화계에선 첩보 장르가 유행하게 됩니다. 국내에 <첩보원 0011>이란 제목으로 방영된 드라마 <맨 프롬 엉클>, <미션 임파서블>의 원작 드라마 <5전선>마이클 케인이 해리 파머로 출연한 <국제 첩보국>, 전술했던 히치콕 감독의 <찢어진 커튼> 등이 이 시기에 등장한 작품들이죠.


# 냉전의 종결과 내부의 적

1980년대부터 서서히 기울던 냉전 시대는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막을 내립니다. 그와 함께 첩보 장르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생기죠. 30년가량 지속된 007 시리즈는 비현실적인 요소들과 정형화된 인물들로 비판받고, 새로운 흐름을 재빨리 잡아챈 할리우드의 영화들이 첩보영화 중심에 섭니다.

긴급 명령

감독 필립 노이스

출연 해리슨 포드, 윌렘 대포, 앤 아처, 조아큄 드 알메이다

개봉 199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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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007 제임스 본드의 자리를 대체한 건 잭 라이언입니다. 작가 톰 클랜시가 창조한 잭 라이언은 CIA 요원으로 영화 <붉은 10>,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 명령>의 주인공입니다. <붉은 10>에선 알렉 볼드윈이, 다음 두 작품에선 해리슨 포드가 맡아 고독한 에스피오나지의 인물이나 멋들어진 제임스 본드와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줬습니다. 이후 <썸 오브 올피어스>,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에선 벤 애플렉, 크리스 파인이 잭 라이언으로 분했으나 아직 해리슨 포드를 뛰어넘은 배우는 없다는 게 정평이죠. 현재 아마존에서 존 크래신스키를 잭 라이언으로 캐스팅, 10부작 드라마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잭 라이언에 이은 후속 타자는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입니다. <5전선>이란 1988년에 방영된 드라마를 영화로 만들면서 톰 크루즈란 스타를 내세웠습니다.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이 아닌 미션에 실패한 직후 첩자를 추적하는 전개, 지나치게 만능인 장비가 아닌 팀원과의 협동을 내세우고 톰 크루즈의 스턴트 액션이 어우러져 위기를 타개해가는 새로운 첩보물의 항로를 밝힙니다. 이단 헌트가 IMF의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한 채 각종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것도 시리즈의 특징입니다. 1편의 성공 이후 2편이 혹평을 받지만 3편 이후 시리즈의 색을 찾으면서 다시 인기를 얻어 지금까지도 건재한 시리즈입니다. 

미션 임파서블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출연 톰 크루즈

개봉 1996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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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디 혹은 애정

007 제임스 본드가 첩보물을 유치한 장르로 탈바꿈시켰다고 혹평을 받아도 영화계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1960년대에는 제임스 본드의 특징을 베낀 아류작들이 많았죠. 그리고 그 족보의 끝은 <오스틴 파워>가 완성시킵니다. 

오스틴 파워

감독 제이 로치

출연 마이크 마이어스

개봉 1999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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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파워는 바람둥이 수준이 아니라 색골에 가깝고, 하는 짓도 전혀 프로답지 못합니다. 악당이라고 해서 영악하거나 괴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과장된 말투나 음담패설의 난무, 뜬금없는 화면 전환 효과 등 <오스틴 파워> 007 시리즈와 당시 존재했던 아류작, 그것이 유행하던 1960년대 문화 전체를 아우르는 커다란 농담입니다. 이런 첩보물을 향한 패러디는 <겟 스마트>, <쟈니 잉글리쉬>, <스파이>로 이어집니다.   

<겟 스마트> / <스파이>


2002, 스파이 영화의 판도는 완전 뒤집힙니다. 새로 리메이크된 <본 아이덴티티><어나더 데이>가 연이어 개봉하는데요, 두 작품의 평가가 상반됐기 때문이죠. <본 아이덴티티>는 이름부터 제임스 본드를 겨냥한, 기억상실증으로 자신의 과거를 찾아 헤매는 첩보요원 제이슨 본을 내세워 영웅이 아니라 암살자에 불과한 스파이의 죄책감을 그리는 데 성공합니다.   

<본 아이덴티티> / <어나더 데이>
본 아이덴티티

감독 더그 라이만

출연 맷 데이먼, 프란카 포텐테, 크리스 쿠퍼, 클라이브 오웬, 브라이언 콕스, 아데웰 아킨누오예 아바제

개봉 2002 미국, 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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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어나더 데이

감독 리 타마호리

출연 피어스 브로스넌

개봉 2002 영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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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007 시리즈 40주년을 기념하는 20번째 영화 <007 어나더 데이>는 과장되고 유치한 장면들로 "첩보물이 아니라 특촬물"이란 농담을 들어야 했죠. 역대 최악의 007이란 평가는 덤이었고요. <본 아이덴티티>는 이후 <본 슈프리머시><본 얼티메이텀>으로 역대급 첩보영화 삼부작을 완성했고, 007 시리즈는 피어스 브로스넌의 하차와 함께 다니엘 크레이그의 등판으로 제이슨 본의 쿨함과 실전 액션을 따라가는 회귀의 방향으로 경로를 돌립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출연 톰 하디, 게리 올드만, 베네딕트 컴버배치, 마크 스트롱, 콜린 퍼스, 스티븐 그레이엄

개봉 2011 영국, 프랑스,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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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흐름에서 진성 스파이를 자처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도 제작됩니다.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정수인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국 비밀 정보부의 내부 첩자 수색 과정을 그립니다. 오로지 자료와 탐문, 끊임없는 관찰로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은 기교 없이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고요하고 차가운 거리를 배경으로 총성 하나마저 극대화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모스트 윈티드 맨>으로 이어집니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갈수록 진지해지는 첩보물 속에서 다시 이전 향수를 기억하는 영화가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입니다. 영국의 비밀 정보기관 요원이 정장을 입고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것부터 007 제임스 본드를 향한 애정을 상징합니다.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기업가가 악당으로 등장하고 '해리 파머' 마이클 케인의 등장, 코드네임이 모두 아서왕의 전설에서 따온 대목은 영국 문화에 대한 경외를 첩보 장르에 녹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감독 매튜 본

출연 콜린 퍼스, 태런 에저튼, 사무엘 L. 잭슨

개봉 2015 미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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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어 아이스 온리> /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포스터

장르 영화들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는 것처럼 첩보영화도 다양한 양상을 보입니다. <아르고>처럼 첩보 작전을 다루되 평범한 첩보원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솔트>처럼 초인적인 첩보원의 능력을 극대화하기도 합니다. <아토믹 블론드>처럼 영화 속 시대와 연출 요소를 불일치시켜 에스피오나지의 비정함과 현대적인 감각을 모두 취하기도 하고요. 첩보영화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국내에서도 <의형제>, <베를린>, <용의자>, <밀정> 등 개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첩보영화의 굵직굵직한 줄기만 따라와도 수많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언급하지 못한 <마타 하리>, <코드네임 콘돌>, <스파이 브릿지> 등 좋은 영화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에디터가 언급 못한 영화들,  댓글에서 함께 공유해주시면 어떨까요?


씨네플레이 인턴 에디터 성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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