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관계는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 관계라는 것은 대부분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친해지게 된다. 가족 간의 관계도 다르지 않아서 설령 부모자식 간이라도 일 때문에 바빠서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면 결국 서먹서먹해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러기 아빠가 대표적인 케이스겠지.

가능하면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만 이 땅의 많은 아빠들이 그렇듯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출근 전에 밥해 먹이면서 잔소리하고, 그리고 퇴근 후 그날 숙제와 할 일 다 했다 싶으면 같이 오버워치(게임입니다) 하고 나는 잘 모르는 힙합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든 같이 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뭐 어차피 더 크면 같이 놀아주지도 않을게 뻔해서(아 잠깐 눈물좀...)

그날도 그랬다. 맨날 놀아달라고 조르는 아들과 함께 있다가 뭘 하면 재미있을지 몰라 고민하던 중 VOD 리스트를 보다가 문득 눈에 띈 아빠와 아들, 거기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와 음식까지. 어 이거 재미있겠는데 싶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바로 <아메리칸 셰>다.

이 영화의 원 제목은 그냥 ‘Chef;셰. 동일한 제목의 프랑스 영화 셰(Comme un chef; 장 르노 주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아메리칸 셰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것 같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레스토랑의 수석요리사 칼 캐스퍼는 유명한 음식평론가가 레스토랑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메뉴를 기획하지만 레스토랑의 오너에게 메뉴 결정권을 뺏기게 된다. 평론가에게 혹평을 들은 칼은 트위터를 통해 평론가에게 욕설을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레스토랑을 그만둔 칼은 아들과 미국 전역을 일주하며 푸드트럭 장사를 한다. 손님을 가까이서 맞이하며 아들과의 사이도 돈독해진 칼. 그의 푸드트럭이 유명해지면서 칼과 싸웠던 음식평론가가 다시 그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푸드트럭을 찾아오게 되고, 결국 칼이 만든 음식의 진가를 알게 된 음식평론가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좋은 결말을 맺게 된다. 

영화속 돈 훌리오 데킬라

칼이 푸드트럭 영업을 하기 전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동료들과 음식평론가의 평론을 기다리며 마시는 술이 있다. 바로 돈 훌리오 데킬라. 데킬라는 블루 아가베라는 용설란과 식물을 재료로 해서 만든다. 요리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가베라는 단어가 익숙할 터다. 우리가 널리 쓰는 아가베 시럽’이 이 식물로 만든 것이다. 

아가베 농장
아가베를 수확하는 모습. 출처 : Orbits.com

이렇게 수확된 아가베는 긴 잎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아래 부분만 사용한다. 이 부분의 즙이 매우 달콤한 맛을 내는데 이 즙을 열처리해서 농축하면 시럽이 되고 이 즙을 발효시킨 후 두 번 이상 증류하면 데킬라가 된다.

참고로 블루 아가베가 아닌 그냥 아가베를 사용해 만든 증류주는 메즈칼(Mezcal)이라고 하며, 블루 아가베를 사용해 멕시코 과나후아토주나 할리스코주에서 만들어지는 것만 데킬라라고 부른다. 탄산이 들어간 와인을 모두 샴페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돈 훌리오 데킬라. 바 로빈스스퀘어

돈 훌리오는 70여 년 전부터 만들어진 데킬라로, 설립자인 돈 훌리오 곤잘레스 이름을 땄다. 앞에서 언급한 할리스코주에서 만들어지며 블랑코를 제외한 레포사도와 아네호는 각각 버번을 숙성했던 오크통에서 8개월, 18개월간 숙성된 후 출하된다. 개인적으론 데킬라는 레포사도나 아네호보다 아예 풋풋한 블랑코(브랜드에 따라서는 실버라고도 표현한다)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바에 들러 오래간 만에 돈 훌리오를 한 잔 했다.

데킬라 베이스의 창작 칵테일. 맛있었어요^^

바에 들러 한 잔만 할 순 없는 법. 돈 훌리오를 마신 후 뭘 또 마실까 고민하다가 바텐더의 추천으로 같은 데킬라를 베이스로 하는 묵직하고 스파이시한 바텐더의 창작 칵테일 몇 가지를 맛보며 좋은 시간을 가졌다. 데킬라는 그냥 샷으로 마셔도 좋지만 마가리타 같은 멋진 칵테일의 베이스로 쓰는 것도 멋지게 잘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잘 아는 믿을 만한 바텐더에게 맡기는 것이고. ^^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 칼과 아들을 보며 나와 내 아들을 생각했다. 칼과 아들처럼 나와 내 아들도 꽤나 사이가 좋은 편이다. 아이가 아직은 초등학생이라 그렇기도 할 테고, 나와 아들이 소위 코드가 잘 맞는 것도 있겠지만, 뭣보다 1년여 집에서 쉰 기간이 아들과 나의 관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건강이 좋지 않아 1년여 일을 쉬고 집에 있었는데 몸이 안 좋다고 집안일을 쉴 수는 없으니 결국 소위 주부(主夫) 노릇을 한 셈이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후까지 집 청소와 빨래를 하고, 오후 3시쯤 아이가 돌아오면 간식 주고 같이 숙제 하고 놀다가 학원에 보내고, 학원에서 돌아올 때쯤 다시 저녁식사를 준비해 먹이고 하루를 정리하는 그런 평범한 하루하루.

하지만 그 평범한 하루하루를 아들과 같이 보내며 같이 숙제를 하고, 캐치볼을 하고, 같이 놀러 다닌 날들이 아들과 나 사이를 보다 돈독하게 해 준 셈이다. 마치 칼과 아들이 함께 푸드트럭 여행을 하며 더 돈독한 사이가 된 것처럼. 그래서 일을 쉬었던 그때 아들과 이 영화를 TV로 처음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저 아빠와 아들 꼭 우리 같네"라고.

영화 마지막에 칼의 모델인 실존 인물 로이 최가 칼을 연기한 존 파브로에게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이 나온다.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고 나니 칼의 샌드위치를 따라서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아들과 같이 속 재료를 만들고, 고기를 굽고, 빵을 준비하면 좋을 것 같다. 바에서 마셨던 데킬라 베이스 칵테일도 흉내내봐야지. 주말을 즐겁게 기다려야겠다.

아메리칸 셰프

감독 존 파브로

출연 소피아 베르가라, 존 파브로, 엠제이 안소니, 스칼렛 요한슨, 더스틴 호프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개봉 2014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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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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