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뜨거웠던 지난해 여름, 이상한 학구열이 불타올라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영어공부를 하던 무렵부터 스페인어는 꼭 한 번 배우고 싶었던 언어 중 하나였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낄 무렵 내게 딱 좋은 활력소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배운 지 반년이 넘은 스페인어 실력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삶이 바빠 최근 몇 달간 소홀했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던 요즘 박서준이 스페인 가라치코의 '윤식당'에서 혀를 굴리는 모습에 다시 한번 불이 화르륵 댕겨졌다. 얼마 전 본 멕시코 배경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에서도 이따금 나오는 스페인어가 참 반가웠다. 알아듣는 단어라곤 hola(안녕), muchacho(소년), gracias(고마워)뿐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외에 많은 사람들이 배우는 제2외국어가 일본어 혹은 중국어라면,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스페인어가 단연 가장 인기다. 브라질을 제외한 라틴 아메리카와 미국 등 전 세계에서 4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쓰고 있는 그 언어! 그만큼 한번 배워두면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었고,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처음 배울 때의 그 설렘이 참 기분 좋았다. 알파벳이 아닌 알파베또를, 에이, 비, 씨, 디가 아닌, 아, 베, 쎄, 데를 배우는 게 흥미로웠고, 숫자·인사·안부와 같은 기본 회화부터 인칭대명사·동사·형용사·분사·의문사를 하나씩 격파해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말 그대로 에스빠뇰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스페인 영화에 큰 관심이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아는 스페인 배우도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에르 바르뎀 정도. 더 솔직히 말하면 스페인 영화 중에는 에디터가 좋아하지 않는 스릴러와 에디터가 싫어하는 공포 장르의 작품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더욱 스페인 영화에 손이 안 갔으리라. 그러던 중 얼마 전 보게 된 영화가 있으니 바로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였다. 스페인어 강의를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꼭 보라며 추천한 영화였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한 공간에서 룸메이트로 만나 벌어지는 일상을 그린다. 스토리라인만 보고는 왠지 미국 시트콤 <프렌즈>가 떠올랐는데, 영화를 보니 한 청년의 미래에 대한 고뇌를 그리는 작품이었다. 작가를 꿈꾸는 프랑스 청년 자비에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스페인으로 강제(!)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에서 온 룸메이트들과 유럽의 축소판 같은 숙소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1년 동안 그는 많은 일들을 겪고,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게 더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스페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비에는 취직을 하지 않고 자신이 줄곧 하고 싶어 했던 글쓰기를 시작한다. 자비에의 선택을 응원하며 나 또한 머리에 느낌표가 탁 하고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감독 세드릭 클래피쉬

출연 로망 뒤리스, 주디스 고드레쉬

개봉 2002 프랑스,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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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영화는 아니지만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도 봤다.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가 여행을 통해 평범한 의사에서 혁명가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의 길고도 긴 풀네임은 '어이' '이봐'의 의미를 가진 스페인어 'Che'와 그의 이름 '게바라'가 합쳐져 그가 혁명가로 활동하는 동안 '체 게바라'로 불렸다.

그저 남미 대륙 횡단이 목적이었던 푸세(체 게바라)와 알베르토는 여행 중 불합리한 사회문제들을 맞닥뜨리고, 나병환자들이 모여있는 산빠블로에 머무르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변화함을 느낀다. 처음엔 스페인어를 듣고 싶어 보게 된 영화였는데 8개월간 오토바이 한 대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푸세와 알베르토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니 뜬금없이 페루에 가고 싶어졌다. 참고로 극중 푸세를 연기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헥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감독 월터 살레스

출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 미아 마에스트로, 메르세데스 모란, 장 피에르 노어

개봉 2004 미국, 독일,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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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를 본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되었느냐고? 대답은 '¡No!'. 유치원생 인사말 정도의 언어능력을 가지고 아웃사이더 수준의 회화를 들으려니 이건 뭐 듣기 평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은 스페인어 공부보다 훨씬 더 값진 것들이었다. 자비에의 꿈과 푸세의 변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던 지난여름 뜨거운 학구열처럼 마음속에서 이상한 열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쨌거나 에디터는 스페인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럼 우린.. "¡Hasta luego!(다음에 또 만나요)"


씨네플레이 에디터 박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