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36년 전 첫 선을 보인 이후, 2월 15일 재개봉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파이널 컷>은 이른바 '사이버펑크'(Cyberpunk) 영화의 효시로 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 <공각기동대>, <토탈리콜>과 같이 사이보그나 복제인간이 등장하는 공상과학(SF: Science fiction) 영화들을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로 분류하고 있죠.

사이버펑크는 애송이, 헛소리 등의 어원에서 출발해, 저항적 음악으로 꽃을 피운 'Punk'와 인공두뇌학 'Cybernetics'를 합친 말입니다. 1980년 브루스 베스케의 단편소설에서 처음 사용한 말로, 일반인들의 삶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 정부, 기업, 종교 등에 대한 거부의 움직임을 담은 운동과 문학, 작품 등을 일컫습니다. 명확하게 정의하긴 어렵지만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빅 브라더'와 같이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에 의해 통제받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매트릭스>

철학자 이정우는 2001년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라는 책에서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바이센터니얼 맨>, <매트릭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5편의 영화를 사이버펑크 영화로 꼽았습니다. 그밖에도 <12몽키스>, <아키라>,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등과 같이 펑크문화의 독특한 저항정신과 디스토피아의 세계관이 얽혀 있는 영화들은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왔습니다. 기존 화폐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화폐 대신 시간을 거래하는 영화 <인 타임>도 사이버펑크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인 타임

감독 앤드류 니콜

출연 아만다 사이프리드, 저스틴 팀버레이크, 킬리언 머피

개봉 201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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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사이버펑크 영화들과 지금의 암호화폐 열풍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지난해 개봉한 <비트코인: 암호화폐에 투자하라>(원제는 'Banking on Bitcoin'으로, 투자가 아닌 은행거래를 이야기합니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비트코인 초기 전도사들의 사상적 뿌리를 1990년대 급속도로 확대됐던 IT업계의 사이버펑크 운동에서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이버펑크는 정보의 통제가 아닌 공유를 통해 중앙권력을 비판하는 세력을 통칭하는데, 그 형태는 '해커'라는 인력으로, '어나니머스'라는 집단으로, 또는 위키리크스의 줄리안 어산지나 미국의 기밀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 같은 다양한 사건으로 분화되며 확산됐다는 이야기죠.

비트코인 - 암호 화폐에 베팅하라

감독 크리스토퍼 카누치아리

출연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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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정부의 권력에서 벗어나 개인권력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사이버펑크 세력에 의해 ‘암호학’이 발전하고, '비밀 거래'라는 하위문화도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들이 돈을 주고받을 때 비밀을 유지하고, 정보를 노출하지 않는 사적인 자유를 위해, 정보와 권력구조에서 벗어난 디지털화폐와 암호화의 기술을 생각하게 되고, 이런 움직임과 사이버펑크 세력이 만나면서 암호화폐가 급속도로 발전했다는 시각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암호화폐(크립토커런시)의 원형은 '디지털 커런시'로 비트코인이 최초의 시도는 아니란 점입니다. 1990년대 초반 데이비드 차움이라는 연구가는 '디지캐시'라는 이름의 디지털화폐를 만들었습니다. ‘결제의 비밀유지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디지캐시를 가지고 도이치뱅크와 파일럿 프로젝트(시범사업)를 벌이는 등 현실화에 근접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현실과의 거리는 너무 멀었고, 대중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전문가들은 바로 이 디지캐시의 정신 중에서 ‘암호화’와 ‘비밀보장’이라는 측면만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들이 바로 사이버펑크 세력이라고 강조합니다.

디지캐시가 사라진 지 10년 후인 2008년 금융위기. 정부와 은행, 신용평가기관 등 제3의 기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시점에 익명의 인물 나카모토 사토시에 의해 비트코인이 탄생합니다. 실제 그의 논문(화이트페이퍼)이 공개된 건 글로벌 금융사인 베어스턴스가 파산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돈은 기본적으로 회계 시스템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발행기관과 은행이나 신용평가사 같은 제3의 신뢰기관이 반드시 필요하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이런 신뢰기관들의 신뢰가 타락했음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비트코인의 세계에서는 금융위기라는 범죄적 사건의 원흉인 중앙발행인이 필요없고, 제3의 기관이 개입해서 신용을 평가해줄 필요도 없습니다. 은행, 신용카드 회사나 모바일 결제회사에 개인정보를 줄 필요도 없습니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의 분산장부 기술을 통해 사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거래를 가능케 했습니다. 비트코인 이전에도 과학자 닉 재보의 비트골드, 할 피니의 RPOW, 아담 백의 해시캐시, 웨이다이의 B머니 등 암호화폐가 시도됐지만, 완성된 시스템으로 대중에게 침투한 건 비트코인이 최초였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사이버펑크와 비트코인의 공생관계를 부정할 수 없어 보입니다. 가격에 대한 불안감, 거래소에 대한 불신과 함께 암호화폐의 미래에 대한 낙관도 갖고 있는 필자도 이 영화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글로벌 금융사 크레디트스위스(CS)가 비트코인의 가치평가법을 개발했고, 미국의 독립 신용평가기관인 와이스 레이팅스(Weiss Ratings)는 암호화폐의 신용평가 등급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암호화폐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과 함께 참여자들의 다양성도 확대되는 모습이죠. 시장에서 가치평가와 신용평가의 기준이 제시되고, 미약하지만 소수의 사용처를 확보해가고 있는 상황은 향후 혁명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중앙권력에 대한 불신과 제3의 신뢰기관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 암호화폐의 가치를 제3의 기관에서 평가하고, 또 다시 그 평가에 의해 시세가 좌우되는 상황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암호화폐가 추구하는 완벽한 신뢰의 세상이, 또 다른 불신을 양산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김동하 한성대 상상력교양교육원 교수 /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