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겉'을 믿는다. 이를테면 이름 같은 것. 제목이 좋은 영화는 그 안에 담긴 것들 역시 훌륭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제목에 대한 호감은 예고편을 봤을 때의 감흥보다 더 길고 강력하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은 그걸 다 충족하는 영화처럼 보였다. ‘물의 모양’이라니,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우선 딱 듣기에 죽이잖아. 들을 수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가 물고기도 사람도 아닌 어떤 생명체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나 그걸 ‘크리처/판타지 덕후’ 기예르모 델 토로가 연출한다는 정보를 구태여 알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고, 해외에서 호평 세례가 일자 기대치는 껑충 뛰어올랐다.

Alexandre Desplat - The Shape Of Water

아쉬웠다. 물로 가득찬 엘라이자(샐리 호킨스) 방안 풍경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아름다운 선율과 어우러지는 인트로를 볼 때의 벅찬 감흥이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점점 떨어지기만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엘라이자와 생명체의 로맨스가 너무나 미흡해 보였다. 뭔가 아름답고 숭고한 관계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들 사이가 도통 '사랑'으로 보이지 않았다. 영화 속 로맨스의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엘라이자와 생명체가 물이 가득 차오르는 욕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신이나 엘라이자가 자유롭게 세레나데를 부르는 흑백 판타지 신도 심드렁한 채 보았다. 평소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에 대해서 곱씹지는 않는 편이라, <셰이프 오브 워터>에 대한 불만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순전히 그 낭만적인 제목 때문이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전작 <아이 앰 러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딱 제목 정도의 호감이었을 뿐, 대단한 흥미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보는 내내 감탄을 다물지 못했다. 따사롭고 고즈넉한 이탈리아 북부 어느 마을에는 정말 거기에 놓여 있는 게(심지어 구겨진 책 표지와 왱왱 대는 파리들까지도) 너무 당연해 보이는 아름다운 오브제들이 가득했고, 그런 여름 안에서 열일곱 소년 엘리오(티모시 살랴메)의 첫사랑이 요동치고 있었다. 엘리오는 7살 많은 교수 올리버의 아름답고 건장한 육체에 곧장 이끌린다. 침대에 뻗어 있는 올리버의 몸을 흔들어서 깨우는 게 설레는 나머지 책을 떨어트려 큰 소리를 내게 해 그를 깨우는 신은 아주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의 사랑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작 5분 만에 엘리오의 사랑을 보여준 영화는 그 어떤 곳에서도 눈 돌리지 않고 온전히 그 사랑만을 지긋이 따라간다. 너무 좋아서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적이, 스크린을 찢고 들어가 저 안에서 뒹굴고 싶다고 생각한 게 도대체 몇 번인지. 그렇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홀린 듯 쳐다보다가 문득 <셰이프 오브 워터>를 왜 미적지근하게 봤는지 새삼 떠오르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하물며 (이야기가 아닌) 이미지로부터 비롯되는 영화에서는 당연히 사랑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단 1초라도 있어야 그 사랑에 빠져들 수 있다. 지금 이 마음이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려하는 태도조차 그 표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 일찍 등장할수록 영화 속 인물들의 사랑에 더 오래 더 깊게 물들 수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분주하다. 엘라이자와 생명체의 사랑을 그리는 가운데 소외된 사람들끼리 나눠야 할 연대와 엘라이자가 일하는 실험실로 대표되는 미국/소련의 냉전까지 이야기 안에 녹여내야 한다. 스파이 챙기랴, 코미디 챙기랴, 분주한 덕분에 영화는 꽤나 재미있다. 다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지나치게 얼버무린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원래 그걸 어정쩡하게 찍는 것 같지는 않다. 엘라이자의 이웃 아저씨(리차드 젠킨스)가 케이크 가게 직원을 지긋이 바라볼 때, 하물며 엘라이에게서 농아 페티시를 느끼는 보안책임자 리차드(마이클 섀넌)가 엘라이자를 CCTV로 훔쳐볼 때, 두 남자가 품는 호감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엘라이자가 생명체를 실험실에서 만나는 동안은 그게 안 보인다. 다른 이들과 마음껏 소통할 수 없는 비슷한 처지를 헤아리고, 그에게 조심조심 언어를 가르쳐주는 과정은 물론 핍박받는 소수자로서 서로를 어루만지는 소중한 태도다. 하지만 거기서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 절반이 훌쩍 지난 시점, 생명체를 실험실에서 빼돌려 자기 집으로 데려온 엘라이자는 그에게 "당신과 친구가 돼서 기뻐요"라고 적힌 카드를 보여줄 뿐이다. 사랑의 쾌락을 뜸들여도 너무 들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뒤늦게서야 사랑이 겉으로 드러난 후에도 아쉬움은 씻겨지지 않는다. 엘라이자는 점점 비늘이 벗겨지고 있는 생명체의 몸을 쓰다듬고, 그의 손 역시 엘라이자의 몸에 닿는다. 그 순간의 뜨거움을 잊지 못하던 엘라이자는 자다가 일어나 생명체가 있는 욕실로 찾아가 옷을 벗는다. 사랑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 빗방울조차 그녀의 손길을 따라 움직일 정도로 사랑의 기운은 충만하다. 그런데 델 토로는 굳이 그 다음에 엘라이자의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가 "그게 있긴 한 거야? 역시 남자는 믿어선 안 된다니까" 하는 농담이나 던지는 대화 신을 붙인다. 웃기긴 하다. 근데 산통이 다 깨진다.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물속의 러브신을 둘러싼 리듬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엘라이자가 생명체를 유혹하는 눈빛은 아주 또렷하고, 그 역시 그녀의 몸에 고스란히 반응한다. 두 사람은 모두에게 가장 익숙한 상태(고아인 엘라이자는 물속에서 발견됐다)인 물이 가득찬 욕실에서 두 번째 섹스를 나눈 것처럼 보인다. "나눴다" 가 아닌 "나눈 것처럼 보인다"고 쓴 이유는 그 순간의 사랑의 쾌락이 지나치게 뭉뚱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각적으로 제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듯한 이 중요한 순간은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집안에 물이 흘러넘쳐 저 아래 극장까지 물이 새는 풍경으로 내려가거나, 심지어 생명체의 재생 능력으로 리차드가 머리털이 자랐다고 기뻐하는 순간까지 끼어든다. 생명체의 영험한 능력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알겠다. 그런데 왜 하필 엘라이자와 생명체의 섹스가 진행되는 사이에 그게 놓여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리차드가 욕실 문을 열고 마주한, 관능이 용솟음치는 듯한 엘라이자의 눈빛이 무가치해지는 편집이다. 그 다음, 리차드가 내가 머리털을 빗어보다니 하며 엘라이자에게 자랑하는 신이 붙는다. 이쯤 되면 헛웃음조차 사라진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가장 아쉬웠던 건 생명체의 시점숏이 없다는 점이다. 단 둘이 있는 순간에도 사랑이 어린 시선은 언제나 엘라이자만의 몫이다. 생명체는 실험실 안에 갇힌 자기에게 알 듯 모를 듯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엘라이자를 쳐다보지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예요"라며 정확한 언어로 노래하는 엘라이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갖지 못한다. '다름'을 대하는 냉혹한 현실에서 서로 의지하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으로 뻗어나가는 영화에서, 연인을 두눈 가득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오직 한 사람만이 전유한다는 건, <셰이프 오브 워터>의 기예르모 델 토로가 사랑을 연출하는 방식을 결국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던 결정적인 지표였다. 엘라이자와 생명체의 사랑이 반쪽짜리로 보이는 물론, 둘이 서로 외로움을 채워줬던 순간조차 무색하게 느껴진다. 제아무리 멋진 제목을 품고 있더라도, 그게 델 토로의 로맨스라면 우선 멈칫하게 될 것 같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출연 샐리 호킨스, 마이클 섀넌, 리차드 젠킨스, 옥타비아 스펜서, 마이클 스털버그, 더그 존스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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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