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2019년의 하루하루가 부지런히 지나는 와중에도, 미처 만나지 못한 2018년의 수작들에 대한 미련은 남기 마련. 작년 연말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서 자주 언급됐던 작품들 가운데, 국내 극장가에 걸리지 못한 작품들을 추려봤다.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
If Beale Street Could Talk
<문라이트>(2016)의 베리 젠킨스 감독은 '흑인'과 '동성애'라는 핸디캡을 두르고 당당히 2017년 오스카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새 영화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는 제임스 볼드윈이 1974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1970년대 초 할렘, 남편 포니(스테판 제임스)가 억울하게 구속된 뒤 그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된 티시(키키 레인)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포니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애쓴다. <문라이트>이 달빛의 푸름을 주된 색채로 활용했다면,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엔 뉴욕에 쏟아지는 햇볕을 닮은 베이지들이 넘실거린다. 티시가 아이를 품에 안는 그 순간, 과연 얼마나 숭고할까?
캔 유 에버 포기브 미?
Can You Ever Forgive Me?
데뷔는 했지만 책이 안 팔려 신작을 낼 기회를 얻지 못하는 작가 리 이스라엘(멜리사 매카시). 급전을 마련하고자 가진 책들을 하나하나 팔던 리는 고인이 된 작가들이 남긴 편지가 돈을 후하게 쳐준다는 걸 알고 작가들을 연구해 가짜 편지를 써서 목돈을 벌게 된다. <스파이>(2015), <고스트버스터즈>(2016) 등으로 당대 할리우드의 최고 코미디 배우로 자리매김한 멜리사 매카시가 실존인물 리 이스라엘을 연기했다. 최근 보여준 유쾌함을 살짝 거둔, 매카시의 그늘진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일찌감치 매카시가 올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퍼스트 리폼드
First Reformed
절망에 휩싸인 목사가 있다. 이라크에 파병 간 아들은 죽었고, 결국 가정을 잃었다. 암세포는 육체를 무너트리고 있다. 환경을 망쳐 배를 불린 거대기업의 손아귀는 점점 커져만 간다. <퍼스트 리폼드>는 좌절과 신앙을 동시에 짊어진 톨러 목사(에단 호크)을 따라가며 그를 둘러싼 모순에 대해 진중한 질문을 던진다. 관객은 1.37:1 화면비의 프레임을 더욱 답답하게 느껴지게 하는 이미지를 견뎌가며 톨러 목사의 고행에 동참해야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걸작 <택시 드라이버>(1976)와 <성난 황소>(1980)의 각본을 썼지만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는 힘을 잃어갔던 폴 슈레이더의 확연한 진일보라 할 만하다.
블랙클랜스맨
BlacKkKlansman
스파이크 리는 <똑바로 살아라>(1989), <말콤 X>(1992) 등 흑인 문화와 인권 문제에 집중하며 저변을 다졌다. 2000년대 들어서 보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며 우왕좌왕 하는 행보를 보여줬던 그는 트럼프 시대를 맞아 <겟 아웃>(2017)의 조던 필과 블럼하우스와 의기투합해 다시금 인종 문제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내놓았다. 백인우월주의 집단 KKK에 잠입해 비밀 수사를 진행했던 흑인/유대인 형사를 그린 코미디다. (스파이크 리와 여러 작품을 함께 한 바 있는) 덴젤 워싱턴의 아들 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매해 입지를 더욱 단단히 다지고 있는 애덤 드라이버의 콤비 플레이에 힘입어, 작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아쉽게도 극장 개봉 없이 2차시장으로 직행했다.
쏘리 투 바더 유
Sorry to Bother You
백인 억양을 쓰는 텔레마케터로 돈을 벌기로 마음먹은 캐시(러키스 스탠필드)는 실력을 인정 받아 점차 높은 직책을 맡는 동시에 기괴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쏘리 투 바더 유>는 백인 억양을 구사하는 캐시의 목소리에 백인 배우의 것을 얹는 등 지독한 유머와 디테일을 챙겨가며 인종주의와 자본주의를 둘러싼 미국의 폐부를 낱낱이 까발린다. 힙합 밴드 더 쿠(The Coup)를 이끌던 부츠 라일리는 전에 없던 급진적이고 지독한 풍자로 똘똘 뭉친 영화감독 데뷔작으로 그 재능을 만방에 알렸다. 라일리는 스파이크 리의 <블랙클랜스맨>이 경찰 캐릭터를 구축한 것에 대한 비판을 표하기도 했다. 영화 제목은 더 쿠가 2012년에 발표한 앨범의 이름이기도 하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The Favourite
<송곳니>(2009),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7) 등 독특한 세계관을 펼쳐 보이고 있는 그리스의 시네아스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18세기 초 프랑스와 전쟁 중인 영국, 여왕(올리비아 콜먼)이 나랏일은 몰버러공작 부인 사라(레이첼 바이스)에게 맡긴 채 시간을 죽이던 와중 사라의 사촌 아비가일(엠마 스톤)이 왕궁 하녀로 들어와 권력 경쟁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데뷔 이래 줄곧 직접 시나리오를 써온 란티모스는 이번엔 작가진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고, 그와 늘 같이 작업하던 티미오스 바카타키스 대신 켄 로치, 안드레아 아놀드 등의 근작을 찍은 로비 라이언이 촬영감독을 맡았다. 불안해 보이면서도 낄낄대는 듯한 란티모스 특유의 로우앵글은 여전해 보인다.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여우주연상(올리비아 콜먼)을 수상했다. 2월 초 개봉 예정.
흔적 없는 삶
Leave No Trace
이라크 참전용사였던 윌(벤 포스터)는 13살 짜리 딸 톰(토마신 맥켄지)과 함께 숲에서 자급자족 하며 살아간다. 나라에서 주는 진통제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그들은 어느 날 발각되고 숲에서 쫓겨나고, 사회 시스템 아래 들어와야 한다. 딸과 달리 아버지는 그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숲에서의 생활에서 가늠할 수 있듯 <흔적 없는 삶>은 단조로운 분위기를 담담히 늘어놓으며 보는 이를 영화 속 인물들의 삶에 들어오게 한다. 편안함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그들의 여정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전쟁에 할퀴어진 남자의 상처와 그로 인해 속절 없이 찢어질 수밖에 없는 가정의 초상을 발견한다. 제니퍼 로렌스의 출세작 <윈터스 본>(2010)을 연출한 데보라 그레닉이 8년 만에 내놓은 새 픽션이다.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당대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새 영화. 담뱃잎 재배로 생활하는 듯한 이탈리아 남부의 어느 마을의 평화로운 생활상을 그려내는 비범한 터치부터 시선을 잡아끈다. 어디서 저렇게 순수한 얼굴을 구했나 싶은 라짜로 역의 배우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를 비롯해 캐스팅 상당수가 비전문배우들로 이루어졌다. 극히 사실적인 묘사로 동화 같은 세상을 구축하던 와중 문득 초현실적인 설정이 끼어들 때부터 <행복한 라짜로>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현재 1월 5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단 한번의 상영이 남았다.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됐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서비스 되지 않고 있다.
에이스 그레이드
Eighth Grade
불긋불긋 뾰루지 오른 앳된 얼굴을 보면서 <레이디 버드>(2017)를 떠올려 봄직하다.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가 2002년에 고등학생이었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였다면, <에이스 그레이드>는 유튜브/인스타그램을 끼고 사는 중학생을 그렸다. 스마트폰에 반쯤 가려져 미묘한 웃음을 띤 얼굴이 크게 박힌 포스터처럼, 추억으로 덧칠된 생기와는 비할 수 없는 답답함이 먼저 떠오른다. 스탠딩 코미디언 출신의 보 버냄 감독은, 8학년 케일라(엘시 피셔)의 순간을 펼치며 자기의 자랑스러운 삶을 자랑하는 게 너무나 당연해진 시대를 통과하는 아이들의 '불안'을 더듬어본다.
콜드 워
Cold War
흑백영화 <이다>(2013)로 1960년대 폴란드의 건조한 분위기를 재현해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파벨 포르코브스키. 시간을 거슬러 1950년대 폴란드의 냉전 시대에 초점을 맞춘 <콜드 워> 역시 컬러가 없다. 두 주인공은 '음악'을 통해 만나 섬광 같은 사랑을 나누지만 냉혹한 세상에 대한 각자 다른 견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폴란드, 독일,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그리고 다시 폴란드를 거치며 그들은 재회하고 헤어진다. 포르코브스키는 자기 부모님의 연애담을 느슨하게 빌어 이토록 질긴 로맨스를 구상했다고 한다. 주인공의 사랑이 음악을 매개로 비롯된 것처럼, 시간과 장소를 이동하면서도 기어코 끊어지지 않는 인연을 그 상황에 걸맞는 음악이 수식해, 그 사랑의 비감과 열정을 극대화 한다. <이다>로 2015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포르코브스키는 <콜드 워>로 작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품에 안았다. 오는 2월 개봉 예정.
프라이빗 라이프
Private Life
레이첼(캐서린 한)과 리처드(폴 지아마티)는 아이가 없는 중년 부부다. 인공수정에 번번이 실패했던 그들은 불임치료를 받으면서 입양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프라이빗 라이프>는 아이를 가지려는 노력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펼쳐낸다. 리처드의 의붓조카가 선뜻 난자를 제공하겠다고 말하며 꽤나 드라마틱한 전개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지만, 영화는 들뜨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부모가 되려 하는 눈물겨운 동기 같은 데엔 눈을 돌리지 않는 <프라이빗 라이브>엔 그저 아이를 갖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두 사람만이 남는다.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카우보이의 노래
The Ballad of Buster Scruggs
코엔 형제의 새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서부극 단편 6개를 모은 작품이다. 여섯 단편들을 아우르는 테마는 다름아닌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의 부정적이고 어두컴컴한 정서에도 불구하고, <카우보이의 노래>는 여느 코엔 형제의 영화들처럼 기묘한 유머 코드가 가득하다. 서로 장르도 분위기도 딴판인 이야기들에 어느새 몰입하다보면 마치 허를 찔리듯 거창한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뭐 하나 달리는 게 없지만, 다섯 번째 단편 <겁먹은 아가씨>를 특히 추천하고 싶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아사코 I&II
寝ても覚めても
2015년, 5시간 17분 러닝타임의 <해피 아워>로 눈밝은 평자들의 찬사를 받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연출한 로맨스. 비전문배우로만 채워졌던 <해피 아워>와 달리, <아사코 I&II>는 요즘 일본에서 가장 활발히 작품 활동을 잇고 있는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특히 한국에서 인기가 좋은 신인 카타카 에리카가 출연한다. 오사카에 사는 아사코(카타카 에리카)와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어느날 바쿠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2년 후 도쿄에서 아사코는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를 만나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된다. 시놉시스만 보면 언뜻 막장 로맨스처럼 들리지만, 같은 얼굴의 두 남자가 번갈아 나타나고 3.11 동일본 지진이라는 사건이 개입되면서 영화는 보다 복잡한 영역으로 넘어간다. 3월 개봉 예정.
문동명 /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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