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이 어린이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은 깨진 지 오래. 많은 어른들도 애니메이션을 보며 울고 웃었다. 이렇게 연령대와 무관하게 감수성을 자극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는 반면, 아이들에게 보여주길 망설이게 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때묻지 않은 동심에 굵직한 ‘스크래치’를 남길 법한, 잔혹한 어른들의 세계를 함축해 놓은 어른들의 애니메이션 7편을 소개한다.


파닥파닥

Padak,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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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대희

목소리 출연 시영준, 김현지, 안영미, 현경수, 이호산

바다 출신 고등어의 횟집 탈출기. 단순히 물고기에 대한 영화였다면 <파닥파닥>을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파닥파닥>은 <니모를 찾아서>와는 다르다. 사람이 먹기 위해 잡은 물고기, 생선의 영화다. 수조 속의 짧은 생이 끝나고 접시 위에 처참히 썰려 나갈 생선. 이게 다가 아니다. 자유로운 바다를 누비던 고등어 ‘파닥파닥’에게 수족관이라는 공간은 낯설기만 하다. 그곳은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다. 폭력과 세뇌로 생선들을 통제하는 올드넙치는 막강한 권력으로 군림하는 독재자를 연상케 한다. 양식, 바다, 어항 등 출신지에 따라 계급이 매겨지는 생선들의 사회는 차별과 편견이 도사린 계급사회를 곱씹게 한다. 관객은 말을 하는 생선들의 똑바로 뜬 두 눈을 통해 (생선의 입장에서) 거대 포식자에 해당하는 인간의 잔혹성을 다시 보게 된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Tim Burton's The Nightmare Before Christmas,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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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헨리 셀릭

목소리 출연 대니 엘프만, 크리스 서랜던, 캐서린 오하라, 윌리엄 히키

충격적인 사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의 감독은 팀 버튼이 아니다. 제작을 맡은 팀 버튼의 이름이 제목에 붙어 팀 버튼의 영화로 착각할 법하지만, 헨리 셀릭이 팀 버튼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뮤지컬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할로윈 마을에 찾아온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 할로윈에 싫증을 느낀 잭. 우연히 크리스마스 마을에 다녀오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첫 크리스마스 계획을 꾸민다. 하지만 할로윈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준비할 리 없다. 그 결과 경쾌한 캐롤 대신 비명 소리로 가득하고 선물 포장지 속엔 해골 따위가 담겨있는 그로테스크한 크리스마스가 펼쳐진다. 스톱 모션의 장인 헨리 셀릭의 첫 장편 데뷔작인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은 온갖 앙증맞은 장치들을 기괴함으로 둔갑시키며 크리스마스의 판타지를 깨부순다. 무려 26년 전의 애니메이션임에도 독창적이고 괴기스러운 매력에 빠진 컬트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작품.


코렐라인: 비밀의 문

Coralin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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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헨리 셀릭

목소리 출연 다코타 패닝, 테리 해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코렐라인: 비밀의 문>은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을 연출한 헨리 셀릭 감독의 작품이며 숨겨진 걸작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린이에게 덥석 추천하긴 꺼려진다.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몇 장면이 있기 때문(최근에 영화를 본 필자에게도 살짝 트라우마가 생겼다). 낡은 외딴 집으로 이사 간 코렐라인 가족. 하지만 늘 일로 바쁜 부모님은 딸 코렐라인을 신경 쓸 새가 없다. 외로운 코렐라인은 홀로 집 안을 살피던 중 비밀의 문을 발견한다. 문 너머는 놀랍게도 똑같은 구조의 실내로 통했는데, 그곳의 다른 엄마, 다른 아빠는 코렐라인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쏟는 다정한 부모다. 코렐라인은 밤마다 습관처럼 이 문을 열게 된다. 이쯤에서 어른 관객들은 불길한 징조를 읽는다. 대가 없는 친절은 의심을 동반하니까. 이곳 사람들의 생김새는 과장된데다 눈 대신 단추가 자리하고 있다. 새까만 단추 눈에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모습이라니 볼수록 괴상하다. 한동안 우리를 오싹하게 할 단추 눈에 유의할 것.


돼지의 왕

The King of Pig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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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연상호

목소리 출연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김꽃비

천만 관객을 기록한 좀비영화 <부산행>이 나오기 전까지 연상호는 한국의 유망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통했다. 장편 데뷔작인 <돼지의 왕>의 등장부터 비범했다. 사실상 애니메이션의 탈을 썼을 뿐, 지독하게 현실적이고도 음습한 스릴러 실사영화의 톤을 갖고 있다. 돼지가 나오진 않지만 인물들은 어딘가 돼지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다. 대범하기 짝이 없는 첫 장면은 싸늘한 시신의 얼굴. 주인공 경민(오정세)은 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해했고, 15년 전 중학교 동착 종석(양익준)을 찾아간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 작가로 근근이 살아가는 종석을 만난 경민. 15년 전 그날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학창시절부터 둘의 삶은 암울했다. <돼지의 왕>은 교내 계급사회를 조명한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우상의 눈물>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돼지의 왕>은 이 소설들보다도 한층 극적인 전개로 향한다. 괴롭힘을 일삼는 동급생에게 처음으로 반격에 나선 철이가 또 다른 괴물로 변모하는 과정을 지나, 파국과 반전을 맞이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희망의 불씨는 어디에도 없다.


사이비

The Fak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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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연상호

목소리 출연 양익준, 오정세, 권해효, 박희본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 이후 차기작 <사이비>를 통해 다시 현실 세계의 음지를 조명했다. 이번 소재는 사이비 종교다. <사이비>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소재, 스토리 등 모든 면에서 실사영화에서 봄직한 사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수몰 예정지역인 마을 주민들을 현혹해 장사를 벌이는 가짜 교회 장로 경석(권해효), 목사 철우(오정세)가 있다. 시골 변방에서 각자 암울한 개인사를 가진 마을사람들은 거짓 기적에 동요하며 세뇌에 빠진다. 그런데 이 사기행각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이 하필이면 포악한 심성의 난봉꾼 민철(양익준)이다. 민철은 대학 시험을 준비하며 차곡차곡 모아온 딸의 통장을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하고, 상대가 누구든 간에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사람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눈앞의 거짓을 보고도 가짜 교회의 편을 들며 ‘하나님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부른다. 사이비 종교단이 가져온 수차례의 비극 뒤에 사기극의 끝은 드러난다. 악인이 악인을 처벌하는 이야기로 선악의 구별을 흐리는 전개는 연상호 감독의 장기다.


퍼펙트 블루

Perfect Blue,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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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곤 사토시

목소리 출연 이와오 준코, 마츠모토 리카, 츠지 신파치, 오쿠라 마사아키

천재 감독 곤 사토시의 데뷔작, <퍼펙트 블루>는 (<돼지의 왕>, <사이비>처럼) 애초에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를 붙이고 나온 성인 애니메이션이다. 강간, 살인 등의 다소 적나라한 묘사는 물론,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정신분열을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려지기 때문. 아이돌 그룹 멤버였던 미마는 그룹 탈퇴 후 배우로 전향해 무리한 노출 신까지 감행하게 되면서 열성 팬의 협박을 받게 된다. 미마의 정신이 피폐해질 무렵, 그녀 주변 사람들이 살해되는 의문의 사건들이 발생한다. 대중의 기대, 강요된 이미지, 열성 팬의 스토킹으로 인해 현실과 환각의 구분이 어려워진 주인공. 거기다 주인공을 둘러싼 여타 인물들의 병적인 행동까지 겹쳐지면서 관객마저 혼란에 빠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보기 드문 호러 사이코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낸 <퍼펙트 블루>는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소개돼 1997년 당시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판타스틱 플래닛

La Planete Sauvage,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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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르네 랄루, 롤랜드 토퍼

목소리 출연 신시아 애들러, 베리 보스트윅, 마크 그러너, 노라 헤프린, 마빈 밀러

체코 출신 프랑스인 애니메이터 르네 랄루는 SF 판타지 세계관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그의 SF 판타지 장편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플래닛>에는 새롭게 창조된 기이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림체도 상당히 독특해서 마치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을 보는 듯한데, 이야기는 훨씬 더 심오하다. 인간을 ‘옴’이라 부르는 이곳 이얌 행성.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옴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푸른 거인 트라그들의 세상이다. 애완용 옴을 기르는 거인들이 있는가 하면, 미개한 옴을 소탕해야 한다고 믿는 거인들도 적잖다. 하지만 길러진 옴이라고 해서 결코 안전해 보이진 않는다. 목줄을 단 채 일정 거리 내에만 머무를 수 있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팽개쳐지기 일쑤다. 어느 날 그들의 말과 지식을 배운 희귀한 옴 ‘테어’의 탈출 이후, 옴들이 결집해 트라그와 전쟁을 벌인다. <판타스틱 플래닛>은 1960년대 말 러시아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영향받은 스테팡 뷜의 소설 <대량 출산 옴족>을 원작으로 했으며, 1973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작품이다.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의 고전.


씨네플레이 심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