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언어의 무경계,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의 작품세계 ②

〈퍼시픽션〉과 〈고독의 오후〉는 연달아 ‘카이에 뒤 시네마’ 베스트10의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산초를 기다리며〉
〈산초를 기다리며〉

〈새들의 노래〉에 대한 제작과정과 후일담은 이 영화에 요셉 역으로 출연한, 영화잡지 ‘시네마스코프’의 편집장인 영화평론가 마크 페란슨이 직접 만든 다큐멘터리 〈산초를 기다리며〉(2008)에 담겨 있다. 영화 촬영지였던 스페인의 그란카나리아섬에서 5일간 배우로 참여한 그는 알베르 세라 감독 특유의 롱테이크와 비전문 배우와의 작업, 그리고 즉흥 연출 등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장을 면밀하게 기록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매 장면, 매 순간 기존의 영화미학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비록 〈새들의 노래〉에서 동방박사들 앞에 나타난 마리아가 “그(아마도 예술의 어떤 경지)와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말이다.

〈내 죽음의 이야기〉
〈내 죽음의 이야기〉

〈내 죽음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미(美)와 진리(眞理)의 개념을 뒤엎으려는 극단적 탐색에 나선다. 카사노바와 뱀파이어의 초현실적 조우를 주선한 이유는 감독 스스로 얘기하길, “진리는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진리”라는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다. 지난 영화들의 주인공들처럼 역시 떠도는 주인공 카사노바를 내세웠는데, 알베르 세라는 그가 당대 미학의 ‘선구자’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실 카사노바는 18세기 유럽 사회의 정치, 문화를 그대로 관통하며 유럽 전역을 끊임없이 여행하고 체험한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의 지성이기도 했다. 국내에 「불멸의 유혹」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던 자서전 「내 인생 이야기」는, 연애담을 넘어 당시 유럽 문화를 생생하게 기록한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내 죽음의 이야기〉
〈내 죽음의 이야기〉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카사노바의 회고록을 꼼꼼히 읽고 연구하면서도, 딱히 가져온 대화라는 게 없다. 오직 그의 관심은 카사노바의 ‘몰락’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유럽 전역을 떠돌았던 그였기에 알베르 세라 특유의 ‘방랑’의 정서가 겹쳐지며, 결국 뱀파이어에게 흡혈을 당하며 제물이 된다. 원작의 ‘인생’은 ‘죽음’으로 채워진다. 퇴폐적이고도 탐미적인 극단의 이미지들이 유혹하는 가운데 극도의 긴장감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전까지 그의 영화가 한없이 비어있는 영화였다면 〈내 죽음의 이야기〉는 압도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불멸을 꿈꾸었지만 늙을 수밖에 없는 황혼기의 카사노바와, 살아 있지만 늙지 않는 존재 뱀파이어의 교차를 통해 보여주는 그 욕망과 고갈의 풍경은, 알베르 세라가 스페인 감독들 중 가장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루이스 부뉴엘적인 세계에 점점 더 다가서고 있다는 증거다.

〈리베르테〉
〈리베르테〉
〈리베르테〉
〈리베르테〉

이후 〈루이 14세의 죽음〉(2016), 〈리베르테〉(2019)를 지나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퍼시픽션〉(2022)은 〈기사에게 경배를〉에 이어 다시 한번 ‘카이에 뒤 시네마’ 베스트 10에 올랐고, 무려 1위였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모국 스페인, 더 나아가 카탈루냐 지방을 정서적 배경으로 삼았다면, 〈퍼시픽션〉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일어나는 정치권력 투쟁과 계급 문제를 탐구한다. 사실 이것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그야말로 굉장한 변화다. 배경을 옮긴 것에 더해 언제나 비직업 배우와 함께 했던 그가 프랑스의 스타 배우인 브누아 마지엘을 영화 속 고위공무원으로 캐스팅했다. 앞서 〈내 죽음의 이야기〉에 1970년대 이후 카탈루냐의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시각예술에 대한 책 「비주얼컬처」를 쓴 빈센 알타이오라는 거물급 예술계 인사를 카사노바 역에 캐스팅한 적 있지만, 어쨌건 그 역시 유명세와 무관하게 비직업배우라고 할 수 있었다.

〈퍼시픽션〉
〈퍼시픽션〉

여기서 그는 점점 더 부뉴엘적인 세계로 침투하고 있다. 겉으로만 봐도 〈퍼시픽션〉이 프랑스에서 제작한 영화는 아니지만, 캐스팅과 더불어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은 것도 부뉴엘이 60대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에서 잔느 모로, 카트린느 드뇌브 등의 스타 배우들과 함께 수많은 걸작을 만들었던 걸 떠올리게 한다. 당대를 휩쓸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에 깊이 경도됐던 부뉴엘은 과거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옮겼다가(이때 연출한 작품이 바로 〈안달루시아이 개〉다) 다시 멕시코로 넘어갔다가 프랑스로 회귀하는 작가적 여정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 점에서 〈퍼시픽션〉은 ‘알베르 세라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이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서 결코 채울 수 없는 부르주아의 가식적인 탐욕은 아름다운 풍경 아래 소년, 소녀들의 은밀한 성매매가 오가고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여전히 부패한 식민지 권력을 행사하는 〈퍼시픽션〉의 세계와 닮았다.

〈퍼시픽션〉
〈퍼시픽션〉

프레디 버틀러의 ‘I Like Your Style’이 흐르는 가운데 클럽의 벌거벗은 원주민 직원들과 제복을 갖춰 입은 제독이 춤을 추는 생경한 풍경은, 딱히 뭐라 묘사할 수 있는 단어를 찾기 힘들다. 언제나 사막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알베르 세라가 폴리네시아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서핑과 제트스키를 즐기는 백인 부르주아들을 포착한 이미지도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한편으로 〈퍼시픽션〉의 드 롤러(브누아 마지멜)는 부뉴엘의 마지막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에서 하녀에게 홀딱 반해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이어가는 마티유(페르난도 레이)와 닮기도 했다.

〈퍼시픽션〉
〈퍼시픽션〉

극도의 미니멀리즘 아래 완결된 서사와 숙련된 연기를 거부하며 해체에 해체를 거듭해온 알베르 세라의 이러한 변화가, 언제나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떠나는 알베르 세라 오디세이의 일탈일 수도 있고, 아니면 드디어 힘겹게 목적지를 찾은 작가의 준비된 미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퍼시픽션〉 다음 작품이 〈고독의 오후〉라는 다큐멘터리라는 점이 놀랍다. 더구나 두 편 모두 연달아 ‘카이에 뒤 시네마’ 베스트10의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기사에게 경배를〉에서 “신이시여, 저를 버리지 마소서. 힘을 주소서!”라고 외쳤던 돈 키호테는 “진리를 말하는 자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처럼 예술의 신을 향해 외치고, 예술의 진리에 가닿고자 하는 알베르 세라의 여정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영화인

예술 언어의 무경계,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의 작품세계 ①
NEWS
2026. 6. 8.

예술 언어의 무경계,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의 작품세계 ①

알베르 세라 감독의 작품이 국내에서 정식 개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독의 오후〉는 현대 영화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알베르 세라 감독이 현대 투우계의 거물 중 한 명인 세계적인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모습을 밀착해서 담아낸 작품이다. 의상을 갖춰 입는 순간부터 경기 이후의 침묵에 이르기까지 투우의 세계를 집요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인터뷰나 해설 없이 오직 투우와 관련된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성된 이 영화는, 인간과 동물,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폭력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예술 언어의 무경계,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의 작품세계 ②
NEWS
2026.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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