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언어의 무경계,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의 작품세계 ①

알베르 세라 감독의 작품이 국내에서 정식 개봉하는 것은 〈고독의 오후〉가 처음이다.

〈고독의 오후〉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 감독의 작품이 국내에서 정식 개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독의 오후〉는 현대 영화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알베르 세라 감독이 현대 투우계의 거물 중 한 명인 세계적인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모습을 밀착해서 담아낸 작품이다. 의상을 갖춰 입는 순간부터 경기 이후의 침묵에 이르기까지 투우의 세계를 집요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인터뷰나 해설 없이 오직 투우와 관련된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성된 이 영화는, 인간과 동물,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폭력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프랑스 영화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2025년 베스트 영화 선정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위),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의 〈시크릿 에이전트〉(4위),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누벨바그〉(8위) 등을 제치고 올해의 영화 1위로 선정됐다.

〈고독의 오후〉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는 이미지와 시간, 감각을 중심에 둔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왔으며, 영화뿐 아니라 도큐멘타(documenta)와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권위 있는 행사에서 전시를 진행하며 영화, 설치, 퍼포먼스 등 예술 언어 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고독의 오후〉는 기존 극영화 작업에서 보여준 미학적 특징을 현실의 세계 안으로 확장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화려한 의상과 정교한 몸짓, 그리고 원초적인 의식의 폭력성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넘어서는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고독의 오후〉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고향인 카탈루냐 북부 바뇰레스 인근의 피게라스나 올로트 같은 곳의 투우장을 찾곤 했다. 이후 투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6~7년 전쯤 바뇰레스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이 아주 유명한 투우사 호세 토마스의 매니저가 됐다. 사실 투우 업계 사람들은 대개 스페인 남부 출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그는 투우의 세계를 더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고, 마침 그 시기에 바르셀로나의 한 다큐멘터리 석사 과정 측에서 학생들과 함께 무언가를 촬영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평소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던 그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그는 ‘유니 프랑스’와의 인터뷰에서 “평소 왕빙이나 지안프란코 로시의 영화들처럼 과감한 접근 방식, 그리고 신비롭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때로는 논란이 되는 현실을 스크린에 담아내는 방식을 경외해 왔다. 하지만 내 주변에서 그런 매혹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재를 찾지 못했다. 고민 끝에, 오직 투우만이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덧붙여 “시대착오적이고 논쟁적이며, 어딘가 광기 어린 전통으로 이루어진 세계였고, 내가 관심을 가진 형태의 다큐멘터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시청각적 가능성을 활용하면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고독의 오후〉
〈고독의 오후〉

〈고독의 오후〉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알베르 세라의 이전 극영화들을 강하게 떠올리게 한다. 국내에서는 영화제를 통해서나 만날 수 있었던 〈기사에게 경배를〉 〈루이14세의 죽음〉 〈퍼시픽션〉처럼,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홀로 서 있는 한 남자의 ‘고결하면서도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망상’(mythomanie)에 주목한다. 안드레스 로카 레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지나치게 높다는 이유만으로 조롱이나 심지어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알베르 세라는 “〈고독의 오후〉는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exposition) 한 남자의 내밀한 친밀함을 보여주려는 역설에 다가가고자 했다”며 “그 친밀함이 끝내 완전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이 불투명한 남자의 사생활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를 촬영하고 싶었다. 표면 뒤에 숨겨진 것에 조금이라도 다가가 보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영화에 어떤 매혹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로카 레이가 자기 자신에게 매혹되었기 때문이며,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최면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거울을 찾는다. 그리고 거울을 발견하는 즉시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든다. 나는 그가 차 안에서, 앞 좌석에 고정된 무인 카메라를 마주하고 있을 때조차 그가 계속 자신의 반사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고, 때로는 약간의 아이러니를 담아 그것을 가지고 놀기 위해서일 것이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영화’(Cinema)에 대한 메타포인 셈이다.”

알베르 세라

이제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세상의 중심에서 ‘망상’(mythomanie)을 외치는, ‘고결하면서도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해온 알베르 세라의 이전 영화들의 세계로 들어가보려 한다. 그를 위해 알베르 세라가 택한 방법은 거대한 원작 안에서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방랑의 오디세이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기사에게 경배를〉(2006)에서는 세르반테스의 소설로 들어가 나이 든 돈키호테가 되고, 〈새들의 노래〉(2008)에서는 성서 속 동방박사가 되어 황무지를 떠돌며, 〈내 죽음의 이야기〉(2013)에서는 심지어 (실존 인물인) 카사노바와 (실존 인물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는) 드라큘라를 한 곳에서 만나게 한다.

〈기사에게 경배를〉
〈기사에게 경배를〉

알베르 세라야말로 현대 영화의 돈키호테 같은 존재다. 칸영화제에 초청되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베스트 10에 오른 두 번째 장편 〈기사에게 경배를〉 자체가 바로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각색한 것이다. 앞선 장편 데뷔작 〈크레스피아〉(2003)에서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무너트리려 애썼던 그는 〈기사에게 경배를〉에서는 아예 제작진과 배우, 세트와 실제 장소, 각본과 즉흥연기를 구분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영화적 여정에 나선다. 산초와 함께, 아니 돈키호테가 그냥 산초라고 부르니까 자신을 산초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한 남자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기묘한 시정(詩情)이 동반한 롱테이크도 이어진다. 돈키호테와 산초가 그저 말없이 풀벌레 소리만 듣는 가운데, 보름달이 나무에 걸쳐 있다가 조금씩 올라가서 중천에 뜨는 순간까지 쭉 보여준다. 알다시피 달은 그대로이지만 지구가 움직여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알베르 세라가 생각하는 예술도 그와 같을 것이다. 저마다의 해석의 차이만 있을 뿐 그 본질은 그대로다.

〈기사에게 경배를〉
〈기사에게 경배를〉
〈기사에게 경배를〉
〈기사에게 경배를〉

뚜렷한 기승전결의 서사가 배제된 가운데, 돈키호테와 산초는 위대한 문학과 인생 사이에서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대사를 주고받는다. 돈키호테가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말’과 ‘말’ 사이를 채운 것은 오직 세상의 ‘공기’와 ‘바람’ 뿐이다. 그 망상의 모험은 갈 곳을 잃은 현대 예술가의 쓸쓸한 고뇌와 닮았다. 돈 키호테의 그 고뇌의 화술은 장황하지만 기묘하고도 숭고한 성찰에 다다른다. 놀랍게도 알베르 세라는 몇몇 짧은 문구 정도를 제외하고는 원작으로부터 대사를 가져오지 않았다. 마치 원작의 바깥에 존재하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일인가. 돈키호테와 산초는 「돈키호테」가 있었기에 존재하는 인물들인데, 알베르 세라는 마치 그 원작이 없었던 것처럼 그들을 불러와 여정을 담은 것이다. 그것은 원작에 대한 재해석도 아니고 재구성도 아니며, 그저 원작의 캐릭터 이름만 빌려온 관념과 세계의 재창조다. 그처럼 설명할 수 없는, 혹은 설명할 의지도 없는 초현실의 세계를 유영하다가 불현듯 돈키호테의 입을 빌어 문학과 영화, 더 나아가 예술이 가야할 길에 대해 질문한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지?”

〈새들의 노래〉
〈새들의 노래〉

원작 「돈키호테」를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문구는 ‘지구상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돈키호테」에 이은 알베르 세라의 다음 목적지는 바로 성서였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별의 안내를 받아 경배하러 가는 성서 속 3인의 현자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한편으로 카탈루냐 지방의 민요로부터 제목을 가져온 〈새들의 노래〉(2008)도 〈기사에게 경배를〉처럼 시적인 정취가 배어 있는 미장센과 함께 또 한 번 초현실의 여정으로 이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성서 등 어딘가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성서도 굳이 ‘원작’이라 표현할 수 있다면) 거대한 원작을 기어이 끌어들이고자 하는 그 욕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단일한 판본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원작이라는 것이다.

〈새들의 노래〉
〈새들의 노래〉
〈새들의 노래〉
〈새들의 노래〉

어쩌면 그것이 알베르 세라로 하여금 성서의 이야기로 이끌었을 것이다. 세 동방박사가 좁은 곳에서 부대끼며 잠을 잘 때는 블랙코미디인가 싶을 정도로 티격태격 다투기까지 한다. 여기서 감독의 욕망은 헤로데 대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결국 메시아에 경배를 바친 동방박사들의 결심을 지켜보는 것이다. 원래 알려진 성서의 이야기를 보자면, 자신을 몰아낼 새로운 왕이 태어난 것으로 여긴 헤로데 대왕이 자신을 대신해 동방 박사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아기에게 경배하고 자신들의 보물인 황금, 유향, 몰약을 바친 뒤, 꿈의 지시를 받아 헤로데를 만나지 않고 바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드디어 목도한 메시아의 존재는 간절히 대면하길 원하는 예술의 숭고한 경지와 가치로 치환할 수 있다. 얼핏 그 모든 것을 해체하고 어떤 규범도 따르지 않는 것 같은 두 영화는 흥미롭게도 계속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로드무비’라는 공통점이 있다.

▶ 〈고독의 오후〉 알베르 세라 감독에 관한 글은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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