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매일 닦는다. 차도, 피아노도. 물론 차를 운전하지도, 피아노를 연주하지도 못하지만, 남편이 남긴 그랜드 피아노와 낡은 자동차를 세수하듯 닦으며 하루를 사는 ‘춘희’(김혜옥)에게 삶이란 끊임없이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다. 새 아파트로 이사한 그는 독일에서 온 지휘자 ‘민준’(저스틴 민),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년 ‘성찬’(박대호)을 만나고, 고요하던 일상에 새로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잔잔한 유사가족 일대기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흐르는 여정〉은 담백하고 단정한 포장 아래 큰 파동을 숨겨놓았다. 다소 급진적이고 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영화는 결코 감정을 앞세우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담담한 연출과 연기로 차곡차곡 응축한 감정은 하이라이트인 콘서트 장면에서 비로소 폭발한다. 영화는 강릉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배경으로 세 사람이 서로의 가족이 되어가는 시간을 따라간다. 언어를 다루는 감각도 섬세하다.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는 대화는 한국어가 서툰 민준과 춘희 사이의 거리를 조율하는 장치가 되며, 수어와 음악, 그리고 편지로 마음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은 때로 말보다 깊은 울림을 전한다. 권해효, 김종구, 강길우, 허준석, 정이랑 등 반가운 배우들이 곳곳에 깜짝 출연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지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이치를 담백하게 그려낸 〈흐르는 여정〉은 〈나는보리〉 김진유 감독이 6년 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장편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과 KBS독립영화상을 받아 2관왕에 올랐고,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새로운선택상을 수상했다.

지난 16일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언론배급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는 김진유 감독과 배우 김혜옥, 저스틴 민, 박대호가 참석했다. 〈흐르는 여정〉은 김진유 감독이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수어 통역사를 떠올린 데서 출발했다. 이후 감독은 서로 다른 아픔과 삶의 방식을 가진 주변인들과 대화하며, 우리가 과연 타인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더해갔다. 김진유 감독은 “제가 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자란 코다라서 언어적인 것들을 많이 생각한다. 시각 언어, 음성 언어,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도 소통할 수 있고 집이나 건물 또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나는보리〉에 이어 영화 내내 한국어 자막을 단 것도 농인의 영화 접근권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음악에 대해서는 “음악이 또 다른 언어로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중요했던 곡 중 하나는 농인이었던 남편이 작곡해 남긴 곡이다. 그 곡이 등장할 때 우퍼로 저음 음역대를 더 강조해서 극장이 조금은 흔들리도록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연극부터 영화, 드라마까지 오랜 시간 연기 내공을 쌓아온 김혜옥은 〈올드미스 다이어리〉, 〈내 딸 서영이〉, 〈황금빛 내 인생〉, 〈김비서가 왜 그럴까〉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사랑받아왔다. 그가 연기한 ‘춘희’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남편 ‘현철’과 갑작스럽게 사별한 뒤 홀로 남겨진 인물이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김혜옥은 출연 계기에 대해 “혈연이 아니어도 이웃과 충분히 가족 같은 정을 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나리오였다”며 “무엇보다 설정 자체가 제가 살아온 과거의 경험, 환경과 매우 흡사했다. 시절 인연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 인연이 닿아 이 작품이 나한테 왔구나 싶어 갈등 없이 선택했다”고 밝혔다.
배우들과의 호흡에 대해서는 웃음 섞인 일화를 전했다. 김혜옥은 “저스틴이 촬영 전에 연습을 안 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처음 만났을 때의 극적인 감동을 살리고 싶어서였다고 하더라. 차에서 만나는 장면이 진짜 첫 만남이었다”며 “순간 마음에 들었다. 보호해 주고 싶은,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춘희’라는 이름은 김진유 감독과 교류하는 강릉 명주동 ‘언니들’ 중 한 명인 문춘희 씨에게서 따왔다. 문춘희 씨는 극 중 계단에 앉아 있는 어르신으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저스틴 민은 넷플릭스 시리즈 〈엄브렐러 아카데미〉와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으로 전 세계 관객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킨 배우다. 〈흐르는 여정〉으로 첫 한국 장편영화 주연을 맡은 그는 “몇 년 동안 한국에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아왔는데,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캐릭터와 스토리에 사랑에 빠졌다”며 “민준은 독일에서 온 인물이지만, 저 또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깊은 연관성을 느꼈다”고 밝혔다. 반말 연기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할머니께 존댓말을 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김혜옥 선생님께 반말을 해야 하니 그게 더 힘들었다”면서도 “굉장히 재미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번 영화는 몇 장면을 제외하고 순서대로 촬영했는데, 캐릭터가 춘희와 성찬을 알아가는 과정과 제가 두 배우를 알아가는 과정이 거의 같았다”며 “영어로는 ‘정’을 정의하기 어렵지만, 촬영하며 마치 가족과 같구나, 이것이 정이구나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반말과 존댓말을 활용한 각본에 대해 김진유 감독은 “이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으면 좋겠다는 마음, 한국 정서를 외국 관객들에게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밝혔다. 이어 “반말을 쓰던 민준에게 춘희가 ‘요’를 붙이게 하고, 다시 반말을 허락하는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반말과 존댓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성찬’ 역의 박대호는 아시아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 1위에 오른 실제 피아니스트로, 이번 작품으로 처음 연기에 도전했다. 현재 CMK 앙상블 단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는 “연기가 처음이라 어색하지 않게 영화에 녹아들 수 있도록 집중했는데, 잘 안되는 부분은 감독님과 제작진, 선생님께서 도와주셨다”며 “평소에는 곡 자체를 얼마나 완성도 있게 연주할지에 집중하지만, 연기로서 연주할 때는 성찬이 어떤 마음으로 이 연주를 하고 있을까에 더 집중했다”고 밝혔다.

관객들에게 전하는 말도 이어졌다. 김진유 감독은 “각박한 세상에서 조금 쉴 수 있는 시간, 울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극장에서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갈 수 있는 영화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스틴 민은 “극장을 나서 거리나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도 자신만의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혜옥은 “김진유 감독님이 이 영화로 돈을 좀 버셨으면 좋겠다”며 웃었고, 김진유 감독은 “오랜만에 나오는 음악 영화로서 한국 영화 안에서 조금이나마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영화 〈흐르는 여정〉은 오는 28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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