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영화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스칼렛 요한슨의 출세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는 그 안에 사용된 음악 목록만 살펴봐도 입이 떡 벌어진다. 데뷔작 <처녀자살소동>부터 범상치 않은 선곡 감각을 보여준 소피아 코폴라 감독다운 리스트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속 음악들을 소개한다.
Girls
Death In Vegas
<사랑은 통역이 되나요?>는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도시 도쿄에서 두 명의 이방인이 느끼는 외로움을 전한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사운드트랙 수퍼바이저 브라이언 레이첼에게 그녀가 좋아하고 자주 듣는 노래들 가운데 도쿄에 어울리는 '드림 팝' 믹스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화려한 소리 가운데서도 몽롱하고 쓸쓸한 정서가 먼저 느껴지는 음악들이 차곡차곡 모였다. 택시에서 막 깨어난 밥 해리스(빌 머레이)가 벙찐 얼굴로 도쿄 거리의 형형색색 네온사인을 바라보다가 제 얼굴이 크게 박힌 위스키 광고를 발견하는 서두에 흐르는 데쓰 인 베가스의 '걸스'(Girls)는 그런 방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선곡이다.
Fantino
Sébastien Tellier
도쿄에서의 일상이 무료하기로는 샬롯(스칼렛 요한슨)도 마찬가지다. 포토그래퍼인 남편은 바쁜 일정 때문에 며칠씩 출장을 나가고, 한밤중에도 혼자 곯아떨어져 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대도시를 여기저기 다녀봐도 공허함만 한층 더 쌓일 뿐이다.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묻는 말에 곧장 힘들다 말하며 눈물도 흘리지만, 바로 그다음 숏에서도 샬롯은 하릴없이 혼자 호텔 방을 돌아다닌다. 괜히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를 다듬고, 천장에 벚꽃 장식을 달아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프랑스의 싱어송라이터 세바스티앙 텔리에의 '판티노'(Fantino)가 더해지면서 그 헛헛함은 불어난다. 낮게 깔리는 어쿠스틱 기타 위에 요란한 신디사이저 소리가 얹어지지만 침잠하는 무드만 계속된다. 기껏 돌아온 남편은 선글래스를 쓴 채 짐을 정리하며 담배 좀 그만 피라고 잔소리나 늘어댈 뿐이다.
Love Gun
Rick James
서양의 감독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단순히 '차이'를 보여주는 걸 넘어 '이상한 것'으로 규정한 채 그걸 당황스럽게 바라보는 이방인의 태도가 역력하다. 며칠째 속 편히 잠들지 못한 밥은 호텔 꼭대기 층 수영장에서 하필 강사의 동작에 맞춰 아쿠아로빅을 즐기는 일본 여성들을 놀랍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릭 제임스의 훵크 넘버 '러브 건'(Love Gun)이 짱짱하게 울리는데 하나도 흥겹지 않아 보이는 건 오직 밥밖에 없다. 영화는 한술 더 떠, 물살을 가르는 밥이 통통 대면서 뛰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까지 기어코 포함시켰다. 물을 들락날락하는 밥의 청각에 맞춰 '러브 건' 역시 수중에서 실제로 듣는 듯한 효과를 더하는 공까지 들인 채 플레이 된다.
Tommib
Squarepusher
앞서 소개한 데쓰 인 베가스의 '걸스'에서 알 수 있듯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수록곡은 본디 격렬한 사운드를 자랑하는 뮤지션이 만든 나른하고 음울한 트랙들로 채워져 있다. 스퀘어푸셔의 '토미브'(Tommib) 역시 마찬가지다. 호텔에 돌아온 샬롯의 남편은 다시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한다. 실망 가득한 얼굴로 "안 가면 안 돼?" 하고 묻는 샬롯의 반응이 그가 호텔에 머무른 시간이 아주 짧았다고 설명하는 것 같다. 어쨌든 남편은 사랑한다는 말과 짧은 키스와 함께 샬롯을 또다시 떠난다. 교회음악 같은 '토미브'과 함께 건물들이 빽빽하게 채워진 신주쿠의 풍경을 샬롯이 멍하니 바라보고 난 후, 샬롯과 밥은 보다 가까워진다. 그리고 더 이상 샬롯이 남편을 마주하는 순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What's So Funny 'Bout) Peace, Love, and Understanding
Elvis Costello & The Attractions
드디어 호텔 바깥으로 나선 샬롯과 밥은 도쿄의 밤을 즐긴다. 샬롯의 일본인 친구인 유명 디자이너의 집에서 (소피아 코폴라의 연인 토마스 마스가 이끄는 밴드 피닉스의 '투 영'(Too Young)에) 한바탕 몸을 흔들고, 그 흥은 가라오케까지 이어진다. 일행이 부르는 섹스 피스톨스의 '갓 세이브 더 퀸'(God Save the Queen)에 화답하듯, 밥은 엘비스 코스텔로의 '(왓츠 소 퍼니 바웃) 피스, 러브, 앤드 언더스탠딩'((What's So Funny 'Bout) Peace, Love, and Understanding)을 부른다. 이 노래는 닉 로우가 작곡하고 그의 밴드 브린슬리 슈바르츠의 명의로 1974년 발표됐고, 그로부터 4년 후 (로우의 프로듀싱 아래 앨범을 발표하던) 엘비스 코스텔로가 커버한 버전이 큰 성공을 거뒀다. 밥이 부르는 노래를 코스텔로의 것이라고 칭한 건 빌 머레이가 너무도 그럴 듯하게 코스텔로의 창법을 모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어려운 노랜데..." 하며 부르는 록시 뮤직의 '모어 댄 디스'(More Than This)는 브라이언 페리의 목소리를 따라하긴 역부족이었다.
Brass in Pocket
The Pretenders
짧은 핑크색 가발을 쓴 샬롯은 프리텐더스의 '브라스 인 포켓'(Brass in Pocket)을 부른다. 가라오케 안 사람들이 모두 자기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반면, 샬롯은 오로지 밥을 응시하며 귀엽고도 도발적인 노랫말을 따라부른다. "나 그대에게 윙크하잖아. 온몸으로 그대를 유혹하고파. 내 섹시함으로 유혹하고파. 내 손가락으로, 내 상상력으로. .... 그대의 사랑을 내게 주세요." 화면 구도와 편집 역시 샬롯과 밥이 이 노래를 주고받는 것처럼 구성돼 있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친구 이상의 감정이 둘 사이에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선곡이다.
風をあつめて
はっぴいえんど
방에서 일본인 친구들이 자기 나라의 전설적인 록 밴드 핫피엔도의 '바람을 모아서'(風をあつめて)를 부르면, 두 사람은 복도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나누어 핀다. 샬롯은 가만히 밥의 어깨에 기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 채운 공간을 빠져나온 이들은 오랜만의 느낀 즐거운 시간의 끝을 가만히 흘려보낸다. 피어나자마자 허공으로 사라지는 담배 연기를 닮은 '바람을 모아서'의 흐리멍텅한 멜로디 위로 아주 살짝 몸을 맞댄 샬롯과 밥의 모습이 영화의 원제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Lost in Translation)을 떠올리게 한다. '바람을 모아서'는 엔딩 크레딧에서도 들을 수 있다.
Sometimes
My Bloody Valentine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섬타임즈'(Sometimes)는 핫피엔도의 느슨한 노래를 찢어버릴 기세로 갑자기 등장한다. 택시를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샬롯의 시선에 도쿄 밤거리의 다양한 모습들이 맺힌다. 영화 오프닝 속 밥이 본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인데, 시퀀스를 감싸고 있는 정서는 확 다르다. 희뿌옇게 읊조리는 목소리를 둘러싼 잔향 가득한 기타 노이즈들의 에너지가, 두 사람이 통과하고 있는 밤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거라고 암시하는 것 같다. 샬롯은 택시에서 잠든 밥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밥은 잠든 샬롯을 그녀의 침대에 편안히 눕힌다. 샬롯은 깨어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고요하게 관능을 퍼트리는 솜씨야말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미덕 중 하나다.
Are You Awake
Kevin Shields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운드트랙은 브라이언 레이첼이 고른 명곡들과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기타리스트 케빈 쉴즈가 만든 4개의 트랙으로 구성됐다. 1997년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해산 후 여러 뮤지션들의 세션이나 프로듀서로 활동하던 쉴즈는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OST를 통해 신곡을 발표했다. 창작에 있어서 악명 높은 완벽주의를 자랑하는 인물인지라, 걸작 <러브리스>(Loveless) 이후 12년 만에 쉴즈가 만든 새 음악이 수록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음악 마니아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결과물은 기존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것과는 아주 딴판. 지저분한 기타 노이즈가 겹겹이 쌓여 결국 거대한 아름다움을 완성하던 것에 비하면 아담한 소품 같은 곡들이었다. 함께 신주쿠 한복판을 돌아다니다가 호텔로 돌아와서도 침대에서 뒤척이는 샬롯을 비출 때 흐르는 '아 유 어웨이크?'(Are You Awake?)의 배치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Alone In Kyoto
Air
소피아 코폴라의 데뷔작 <처녀자살소동>(1999)의 사운드트랙은 프랑스 일렉트로니카 듀오 에어가 만들었다. 그들의 연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도 계속됐다. 샬롯이 혼자 신칸센을 타고 교토에 와 명소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여정을 따라가는 3분 남짓한 대목에 에어의 '얼론 인 교토'(Alone in Kyoto)가 내내 흐른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 사운드트랙을 위해 만든 곡이다. 케빈 쉴즈의 소품들처럼, '얼론 인 교토' 역시 다채로운 악기를 활용해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이미지를 선사하던 에어가 한껏 힘을 덜어낸 소리로써 일본적인 선율을 구성해 샬롯의 호젓한 여행을 수식한다. 에어가 2004년 발표한 앨범 <토키 워키>(Talkie Walkie)에도 이 곡이 수록돼 있다.
Just Like Honey
The Jesus and Mary Chain
100분 내내 샬롯과 밥의 사랑을 느릿느릿 펼치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도 클라이막스는 분명히 존재한다. 샬롯과 어색한 안녕을 나눈 밥이 택시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곧장 뒤쫓아가 사랑을 확인하는 마지막 신이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안고 (관객은 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눈 후 입을 맞춘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작별을 고한다. 둘의 거리가 다시 멀어지는 순간,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의 '저스트 라이크 허니'(Just Like Honey)가 쿵 하고 울리기 시작한다. 로네츠의 명곡 '비 마이 베이비'(Be My Baby)를 그대로 따온 드럼에 베이스와 기타 소리가 차례차례 더해지면서, 샬롯과 밥은 서로의 길을 간다. 노래는 멈추지 않은 채 카메라 역시 '빌 머레이'의 복잡한 표정을 따라간다. 그리고, 밥이 지금 보고 있고 언젠가 샬롯이 봤을지 모르는 도쿄의 풍경이 이어진다. 이별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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