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쓰고 다시 쓰기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 말미, 주인공이자 화자인 마이클은 이런 말을 한다.

“가끔 나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하였다. ……그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한나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이후로 우리의 이야기는 나의 머릿속에서 여러 번에 걸쳐 쓰였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약간씩 다르게 쓰였다. 즉 매번 이미지들도 달랐고, 줄거리와 생각의 가닥도 다르게 전개되었다.”(p.272)

영화 <어톤먼트>의 말미, 이제 유명한 작가가 되어 스물한 번째 책을 출간하게 된 브라이오니도 인터뷰에서 이와 유사한 말을 한다. “이상하게도 첫 소설이나 마찬가지죠.. 전시에 성 토마스 병원에서 여러 번 습작을 했어요.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랐죠..” 이렇게 브라이오니의 소설 <어톤먼트>도 1940년부터 1999년까지 다시 쓰고 다시 쓴 ‘반복’의 결과물이다.

그들은 왜 다시 쓰고, 다시 쓰는 것일까? 이 고통스러운 ‘반복’이 문제다.

말로 죽인 연인들

한나의 죽음에 대한 마이클의 책임이 모호한 반면, 로비와 세실리아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브라이오니의 죄과는 명백하다. 어린 날의 위증으로 그녀는 결국 두 연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녀의 위증은 우선 ‘질투’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은 풍부한데 경험은 없는 소녀의 풋사랑은 충동적이고 일시적이게 마련이지만,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을 만큼 무모하기도 하다. 로비에게 자신이 물에 빠지면 구해줄 수 있느냐고 물은 뒤, 즉각 물에 뛰어드는 장면은 그녀가 로비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질투는 항상 사태를 과장해서 보게 하거나 곡해해서 보게 만드는 법, 그녀의 눈엔 세실리아에 대한 로비의 사랑이 오로지 색욕과 폭력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브라이오니의 위증을 추동한 것이 질투 이면의 계급적 편견이란 사실을 강조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브라이오니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장면을 자주 연출하는데, 물론 그 창문은 고색창연한 영국식 저택의 창문이다. (정리 강박증자이기도 한) 브라이오니는 저택의 눈으로만 세계를 본다. 그럴 때 하인의 아들인 로비(그가 아무리 잘생기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는 무모하게도 귀족의 지위를 넘보는 ‘머슴’이 될 수밖에……. 이 점은 세실리아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인데, 가령 세실리아의 오빠인 리온이 로비를 두고 갑부 폴 마샬에게 하는 말은 이렇다. “로비는 아비가 20년 전 버린 가정부의 아들인데 동네 학교 장학금 받다가 우리 아버지 덕에 케임브리지에 갔지. 요즘엔 우리 정원 일 하면서 허송세월하고 있지.”

표면적인 친절과는 달리 이 저택 전체가 실은 로비에게 완전히 (계급적으로) 적대적이라는 사실이 영화적으로 잘 연출된 장면이 있다. 쌍둥이 가출 사건이 일어났던 밤 그들을 찾아낸 로비가 돌아오는 장면이다. 저택의 불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굳은 표정으로 나란히(올려다보아야 하는 일렬횡대는 얼마나 위압적인가? 이 장면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의 학살 장면’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 있는 가족들, 중앙엔 이 집의 가장 완고한 여주인 어머니가 서 있고 좌우로 귀족들의 자제들이 도열해 있다. 그들은 이미 로비를 강간범으로 ‘단정하고’ 있다. 훗날 (브라이오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로비가 브라이오니에게 격분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점이다. “내가 받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너와 네 가족 모두에게 난 하인이나 마찬가지였어. 언제까지나 믿을 수 없는! 널 필두로 모두 합심해서 나를 늑대 소굴에 던져 넣었어!”

위증은 브라이오니가 했다. 그러나 그날 저택에 있던 귀족들 모두, 계급적 편견 속에서 그 위증에 공모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연인의 죽음이다. 단 하루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단 한 번 어둠 속에서 (영국 저택의 심장부이자 전통의 보관소인 고서가를 등지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을 나눈 두 연인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로비는 던커크 해변(원작 소설의 방대한 전쟁 묘사를 장장 5분 동안의 롱테이크로 대신한 이 해변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압권이다)의 한 벙커에서, 세실리아는 발햄의 지하대피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

이야기는 속죄할 수 있을까

강간 사건 다섯 해 후인 1940년, 브라이오니의 ‘속죄의 글쓰기’가 시작된다. 타이핑 소리가 영화 안팎을 어떤 장면에서는 미메시스적으로 어떤 장면에서는 디에게시스적으로 넘나드는데, 이 영리한 음향은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이 실은 브라이오니가 쓰고 있는 허구의 세계에 속해 있음을 암시한다. 성 토마스 병원의 추운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속죄 행위로서의 글쓰기, 그러나 글 따위로 ‘가장 처참하게’ 죽은 연인들에게 속죄할 수 있을까?

꿈과 마찬가지로 기억도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방어’와 ‘부인’과 ‘보상’은 기억이 가장 아픈 곳을 피해 가는 메커니즘들의 이름이다. 기억은 보지 않은 것을 본 것으로, 본 것을 보지 않은 것으로, 책임을 무책임으로, 새드엔딩을 해피엔딩으로 윤색함으로써 기억하려는 자를 죄책감으로부터 보호한다(태극기 부대의 심리가 이와 같다). 브라이오니의 글이 이 윤색을 돌파하지 않는 한(즉 실재와 조우하지 않는 한) 그녀의 ‘이야기’는 속죄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이야기하기’란 애초부터 ‘실재’를 길들이려는 속성이 있게 마련이다. 인류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을 이해할 만하고 납득할 수 있는 무엇으로 길들이고자 만들어낸 최초의 이야기가 ‘신화’ 아니던가? 소설이란 최종심의 계급투쟁을 은폐하고 봉합하는 ‘상징화 형식’(프레드릭 제임슨)에 다름 아니지 않던가? 분석상담에서도 환자가 발화하는 과거사는 기억의 ‘발견’이 아니라 ‘재구성’이 되어야 한다지 않던가? 속죄의 글쓰기가 처하게 되는 난경이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많건 적건 기억의 쾌락원칙에 지배당한 거짓말이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브라이오니의 최초의 글쓰기는 속죄에 이르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중단되었으리라. ‘반복’(오토마톤)은 그럴 때 증상처럼 발생한다. 실재의 구멍(내가 그들을 죽게 했는데……)은 자꾸 문장들을 모으고 부른다. 그러나 기억의 쾌락 원칙은 그 구멍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글쓰기를 중단시키거나 기억을 미화한다(그들은 죽지 않았고, 전쟁 중에 다시 만나 행복하게 바닷가를 거닐고 있어). 속죄는 실패하고 글은 다시 쓰여야 한다. ‘실재와의 만남’(투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러한 반복은 되풀이된다. 브라이오니의 첫 소설이(마이클의 ‘한나 이야기’도) 59년 동안, 여러 판본으로 ‘반복’해서 쓰였던 이유는 이렇게 해명된다.

투케 : 글쓰기는 속죄할 수 없다

과연 브라이오니의 글쓰기는 속죄에 성공했던가? 영화의 결말, 인터뷰에서 브라이오니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실 전 용기가 없어서 1940년에 언니를 찾아가지 못했어요. 제가 그들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허구예요. 조작되었죠. 사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왜냐하면 로비 터너는 1940년 6월 1일에 브레이 듄스에서 패혈증으로 죽었어요. 후송 작전의 마지막 날이었죠. 언니인 세실리아와도 못 만났어요. 1940년 10월 15일에 발햄 지하철역 위의 가스와 수도관에 투하된 폭탄 때문에 죽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언니와 로비는 그토록 원했고 누릴 권리가 있었던 둘만의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요.”

그녀의 말로 미루어보건대, 이제 그녀는 실재와 조우했다. 자신이 쓴 소설에서와는 달리 자신은 끝내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고, 그들에게 사실을 고백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용서받지 못했음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쓴 ‘소설’이 속죄 받을 만한지는 모르겠다. 그 속에서 로비와 세실리아는 네 번째 휴가를 맞아 해변을 다정하게 산책하고 있다. 브라이오니는 “책에서는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그들이 삶에서 잃은 것을 주고 싶었”다며, “이것이 나약함이나 회피라고는 생각 안”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만 이해하기엔 그녀의 고백이 좀 늦은 감이 있다. 혈관성 치매에 걸린 그녀에게는 이제 ‘남아 있는 나날’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그녀의 죄를 알았지만, 그녀는 그 죄를 감당해야 할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야 그 죄를 고백했다.

원작 소설(<속죄>, 이언 매큐언, 한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3)의 결말은 그와 조금 다르다. 일흔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브라이오니가 새벽 다섯 시, 책상에 앉아 고백한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는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나로서는 영화의 결말보다 이 결말이 더 마음에 든다. 영화 속 브라이오니에게 속죄란 사실의 고백이었다. 그러나 소설 속 브라이오니에게 속죄란 ‘속죄할 수 없다는 사실과의 조우’다. 인물과 사건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이 소설가에게 주어져 있는 한, 글쓰기를 통한 속죄는 불가능하다. 기억은 쾌락원칙에 따라 방어되고, 부인되고, 윤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이야기는 속죄를 완성할 수 없다. 다만 끝없이 속죄하도록 노력하게 할 수는 있다. 이것이 소설 속 브라이오니가 만난(투케) 실재의 ‘윤리’다.

연인들에게도 잘못은 있어서

못 본 척 지나가기엔 마음이 허락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브라이오니의 허구 속에서 로비와 세실리아는 실제 강간범이 폴 마샬이 아니라 대니 하드먼인 줄로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폴 마샬은 전쟁을 기화로 벼락부자가 된 귀족이고, 대니 하드먼은 로비보다 더 어리고 못 배운 하급 하인이었다. 연인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계급이 만든 편견의 그물망 속에서 타인을 의심한 잘못……. 그리고 나는 그 질기고도 질긴 그물망 속에서 평생을 집사로 살았던 한 노인의 이야기를 안다. <남아 있는 나날>(제임스 아이버리, 1994)의 스티븐스가 그다.

사족

어떤 숙제가 있어서, 나는 이 글을 전두환과 이순자와 지만원의 자서전들을 곁에 두고 써야 했다. 그 어떤 글도 쓰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참기에 무척 힘들었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