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얼마 전이다. 우린 <테넷>을 통해 꽤나 당혹스러운 인버전의 세계를 몸소 체험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느껴"라는 다소 불친절한 답을 심어둔 놀란 감독에 관객들은 원성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테넷>은 '엄청난 그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펼쳐내며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여기, <테넷> 같은(?) 작품이 또 있다. 이번 주 왓챠에서 독점 공개된 8부작 드라마 <데브스>다. <데브스>는 그 이름도 웅장한, 'SF 테크 스릴러' 장르라 자신을 소개한다. 공상 과학에, 공학적 개념에, 게다가 스릴러 장르까지 한 상 가득 차려냈다는 거다. 정말 이 세 가지를 다 맛볼 수 있다고? 물론이다. 더욱 주목해볼 만한 건 <데브스>는 전개상 다소 복잡한 과학 개념들을 늘어놓지만, 그것들을 이과적 방식이 아닌 철학적 측면으로 곱씹어 보고 싶게 만드는 문과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엥?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그렇다면 <데브스> 속 대사로 답을 하겠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따라와요."


(왼쪽부터) <데브스> 릴리, 세르게이(칼 그루스맨)

주검으로 돌아온 남자친구, 아무도 모르는 비밀 부서 '데브스'의 정체

<데브스>의 스토리는 아주 복잡하지만 한편으로는 간단하게 설명된다. '최첨단 IT 기업을 배경으로 남자친구의 자살에 감춰진 비밀을 추적하는 주인공 릴리(소노야 미즈노)에게 벌어지는 기묘한 일을 그리고 있다'라는 왓챠의 소개 글처럼 남자친구의 죽음에 감춰진 비밀을 파헤치는 주인공 릴리의 뒤를 따라가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누가 (남자친구를) 죽였는지'보다는 '무얼 숨겼는지'라고 할 수 있다. <데브스>는 1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세르게이(칼 그루스맨)를 통해 대체 '어마야'라는 회사에 어떤 비밀이 감춰졌는지 보여준다.

<데브스> 릴리(소노야 미즈노)

어마야는 실리콘 밸리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IT 회사다. 이곳에서 일하는 릴리와 세르게이는 각각 암호화 부서와 양자 컴퓨팅 부서에서 근무하는데, 특히나 세르게이는 양자 컴퓨팅 분야의 천재다. 어느 날 세르게이는 선충(Nematode)의 10초 뒤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혁신적인 알고리즘을 발표하고, 그 성과를 통해 회사 내 비밀 부서인 데브스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제안받는다. 데브스에서 일하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 출근 첫날부터 세르게이는 불쾌한 질문들을 통해 사생활 검열을 받은 후에야 사무실로 안내를 받는다.

사무실 공간도 평범치 않다. 다른 부서들과는 한참 동떨어진 숲속에 위치한 데브스는 전자파에 떠 있는 캡슐 이동 수단을 통해서만 진입 가능하다. 창문 하나 없는, 진공 상태의 사무실에 들어선 세르게이는 컴퓨터를 켜고 앉아 유심히 화면 위에 적힌 코드를 보기 시작한다. 잠시 후 그는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구토를 한다. 그 후로 세르게이는 사라졌고, 여자친구인 릴리의 앞에 다 타버린 잿가루가 되어 나타났다. CCTV 분석을 통해 세르게이의 죽음은 자살로 수사 종결됐지만, 릴리는 데브스에 의문을 품고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데브스> 1화의 이야기다. 과연 7화에 걸쳐 풀어야만 하는, 세르게이가 목격한 그 엄청난 '데브스 프로젝트'의 비밀은 무엇일까.


<데브스> 포레스트(닉 오퍼맨)

모든 일은 선행 사건으로 결정되는 것일 뿐

<데브스>는 릴리가 파헤치는 진실과 비밀을 쫓아가는 이야기지만, 사실상 모든 이야기의 중심엔 포레스트(닉 오퍼맨)가 서 있다. <데브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포레스트에게 눈을 떼선 안된다. 포레스트는 어마야의 대표 이사로 어마야는 세상을 떠난 그의 딸 이름이기도 하다.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은 그는 참을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데브스 프로젝트'로 승화시킨, 프로젝트의 창조자다. 그는 말끝마다 '결과'라는 말을 덧붙이곤 하는데, 그가 비밀리에 진행하는 '데브스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다.

<데브스>는 양자 역학, 양자 컴퓨팅 기술, 알고리즘, 다중 우주론 등 복잡한 과학적 개념을 끊임없이 제시하지만 비교적 상세한 대사들로 관객들을 이해시킨다. 그럼에도 '데브스 프로젝트'를 수월하게 따라가기 위해선 특히, '결정론'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알고 보는 게 좋다. 데브스가 하는 일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슈퍼) 양자 컴퓨팅을 통해 데이터화 시키고, 축적한 데이터를 통해 과거와 미래의 일을 추론하는 거다. 쉽게 말하자면 당장 10초 전에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10초 뒤엔 무슨 행동을 할지 연구하는 것이다. 이런 분석들을 통해 그들이 입증하려는 '결정론'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간의 자유 의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만드는" 전자(electron)적 인과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는 논리다. 즉,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역시 이 글을 당신의 '의지'대로 클릭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이미 어떤 과학적 힘에 의해 결정된 행동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결정론은 기묘하면서도 매우 아름답죠.

아주 작은 정보의 조각으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어요.

모든 입자의 상태는 그 주변 입자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어요.

하나의 상태만 이해한다면, 다른 입자의 상태도 이해할 수 있죠.

그걸 계속하면 모든 것의 상태를 알 수 있어요.

<데브스> 속 포레스트의 대사

<블랙 미러>의 철학적 메시지에 빠져본 이들이라면

결국 <데브스>는 결정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비밀스러운 첨단 기술에 대한 이야기다. 물리학의 세계를 펼쳐낸다는 지점에서 <데브스>는 <테넷>과의 비교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데브스>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곱씹어 보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 미러>를 소환하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발전된 기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섬뜩함을 전한다는 면에서 자연스레 두 작품을 동일 선상에 올려놓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적인 설명 방식에 있어서 <블랙 미러>보단 <데브스>의 농도가 더 짙고 심오하다. 결정론, 그리고 다중 우주론으로 확대되는 철학적 개념을 통해 <데브스>는 세계는 과연 하나인지, 우리는 누구일지, 과연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데브스>를 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데브스 프로젝트'가 가진 충격적 야망이 쉽사리 상상되지 않겠지만, 어찌 됐든 한 가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데브스 프로젝트'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며, <데브스>는 그 과정을 깊이 있게 파고든다는 거다.


<데브스> 릴리(소노야 미즈노)

뛰어난 배우진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릴리의 얼굴

과학적 얘기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보니 <데브스>가 수면제(?) 영화처럼 보이지만, <데브스>는 엄연히 SF 테크 '스릴러' 장르다. 그 중심엔 릴리를 연기한 배우 소노야 미즈노가 있다. '데브스 프로젝트'의 정체를 알아갈수록 공포와 혼란에 빠져드는 소노야 미즈노의 명연은 느릿한 극의 전개에 힘을 실어주며 몰입도를 높였다. 사람보다는 사상이 중심되는 이야기 일지라도, 다중 우주론이라는 포부가 주가 되는 이야기일지라도, 그 모든 시작에는 사랑하던 연인의 죽음을 맞이한 개인의 상실이 있다. 세르게이는 대체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훑어가는 릴리의 혼란스럽고 비통한 얼굴은 관객들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건 물론, 비밀을 알아갈수록 두려움이 진해지는 그의 표정은 '데브스 프로젝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극 중 숏커트 헤어스타일로 변신을 한 소노야 미즈노는 <엑스 마키나>의 교코를 통해 알려진 배우인데, 우리가 잘 아는 <라라랜드>에선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미아(엠마 스톤)의 친구로 출연하기도 했다.

<라라랜드>에 '미아' 친구로 출연한 소노야 미즈노. <데브스>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역시 이과 영화...? 오차 없이 계산된 완벽한 연출

<데브스>는 결정론과 다중 우주론에 관한 지적 유희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점 외에도 눈과 귀를 사로잡는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8부작으로 구성된 TV 드라마지만 영화 같은 연출법을 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어마야라는 회사를 보여주는 방식은 시각적인 경이로움을 선사하는데, '데브스 프로젝트'가 실행되고 있는 데브스 사무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철저한 계산을 통해 지어진 듯 보이는 사무실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나 자기장으로 인해 공중에서 떠다니는 금색 정육면체의 캡슐 이동 수단이다. 이를 두고 미국의 TV 평론가들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리들리 스콧의 미래 도시를 언급하며 <데브스>가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을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신비로운 시각적 연출이 SF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면, <데브스>의 음악은 스릴러 영화답게 괴이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새벽에 불을 끄고 <데브스>를 보다 'Object input'이라는 OST가 흘러나오는 순간 불을 켜버렸다. 공포 영화가 아님에도 찝찝하고 불쾌한 음악이 깔리는 순간 <데브스>는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게 한다. 데브스 부서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어마야 동상을 천천히 비추며 흘러나오는 효과음과 OST들은 기이한 공포감을 형성하며 긴장감이 풀어지려 할 때마다 시청자들의 심장을 조인다. <데브스>가 뛰어난 연출력을 가진 웰 메이드 작품이라는 건, 제72회 에미상 촬영, 사운드 편집, 사운드 믹싱, 특수 시각효과까지 총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철학적 야망이 담긴 수작

이제서야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이름을 꺼내게 됐지만, <데브스>가 만든 세상은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그린 아름다운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엑스 마키나>와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을 통해 SF 스릴러계의 명수로 떠오른 알렉스 가랜드는 2시간짜리 영화가 아닌 8부작 드라마 <데브스>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확장했다. 그는 8화가 진행되는 내내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세르게이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데브스는 무엇인지, 데브스 프로젝트를 이끄는 포레스트는 누구인지, 그래서 포레스트가 성취하려고 하는 건 무엇인지 등을 계속해서 물어보며 시청자의 뇌를 뒤흔든다. 과학적 논쟁, 철학적 함의, 놀라운 시각 효과를 한데 잘 버무린 그는 "올해 가장 창의적인 TV 드라마"라는 평을 얻으며 <데브스>를 성공 궤도에 올렸다.

<데브스>는 가볍게 소비되는 이야기에 지친 이들을 위한 드라마다. 자극적이고 강렬한 콘텐츠가 따분해진 이들에게 생각의 숲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지금 내가 있는 세상의 존재를 의심하고, 그 이상의 다중 세계를 경험하는 것, 거기에 더해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풀어놓은 여러 철학적인 수수께끼에 답을 찾고 싶은 이들이라면 <데브스>는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씨네플레이 인턴기자 유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