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2020년 2월 선댄스영화제에서 <미나리> 팀

지난해(정확히 2019년 5월 칸영화제부터라고 해야겠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면, 올해(이것도 정확히 2020년 2월 선댄스 영화제부터라고 해야겠지만) 이슈가 된 작품은 단연 재미교포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다. 역시 아시아 출신의 클레오 자오가 연출한 <노매드랜드>와 함께 이 두 작품은 현재 한창 진행 중인 북미 시상식 시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성공을 필두로 <서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삼부작, <기생충>, <페어웰> 등 최근 불어 닥친 아시안 콘텐츠의 열풍이 한순간 유행이 아님을, 그리고 또 거품이 아님을 훌륭하게 증명해낸다. 데뷔작 <무뉴랑가보>로 칸영화제를 밟았던 정이삭의 이 네 번째 장편은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미나리>

미국영화임에도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미나리>

1980년대 미국 남부 깡촌인 아칸소 주로 이주한 한인 가족의 삶을 진솔하고 서정적으로 담아내는 <미나리>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피상적인 목표나 인종차별과 같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건들기보단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감정과 관계에 집중한다. 가족은 이를 보여주는 가장 쉽고 강력한 모범 답안이고, 타국에서 소외감에 젖어도 웃고 울고 화내고 사랑하며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또 다른 고향이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은 어디서든 잘 자라는 악착같은 생명력을 지닌 미나리와 닮았다. 희망찬 내일과 아름다운 구원이란 드라마틱한 결말을 선사하진 않지만, 가족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휴머니즘 가득한 테마는 많은 관객들의 공감과 평론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미나리>

브래드 피트의 영화사인 플랜B에서 미국 자본으로 제작됐음에도 한인 이주 가정을 다룬 관계로 대사의 50% 이상이 한국어로 진행된다. 이로 인해 최근 열린 제78회 골든글로브에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올라 수상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건 단연 배우들의 연기다. 자신의 얘기라며 제작자로도 참여한 스티븐 연을 비롯해, 복잡한 심경을 섬세하게 그린 한예리와 자연스러운 아역을 소화한 앨런 킴과 노엘 케이트 조도 인상적이다. 이들 사이에서 유머와 탄식, 눈물을 자아내는 한국 할머니 윤여정의 연기는 명불허전이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각종 시상식에서 26차례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2주 뒤 발표될 오스카 후보에도 한국 최초로 배우 부문 지명을 받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미나리> 사운드트랙 표지

아름답고 초현실적인 에밀 모세리의 음악

이 따스함을 더욱 배가시켜주는 건 에밀 모세리가 맡은 음악의 힘 덕분이다.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다가오는데, 그도 그럴 것이 <미나리>가 그의 세 번째 작업이기 때문이다. 1985년에 태어나 버클리 음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그는 단편 작업 몇 개와 TV쇼에서 추가음악을 담당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2019년 장편 <더 라스트 블랙 맨 인 샌프란시스코>로 영화계에 정식 데뷔를 했다. 이후 에반 레이첼 우드가 출연한 범죄 코미디 <카조니어>를 거쳐 데뷔작을 함께 했던 프로듀서 크리스티나 오의 제안을 받아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에 참여하게 된다. 한국 이민자라는 설정과 80년대라는 배경, 블루그래스 음악이 흐를 듯한 미국 시골이 무대지만, 모세리는 정이삭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이런 요소에 주안점을 두지 않기로 결정한다.

에밀 모세리

<미나리>

그래서 <미나리>의 음악은 한국적인 색채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도, 컨트리 음악이 흐르지도, 80년대 특유의 촌스러운 일렉트릭 사운드가 전면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부모와 할머니를 반추하는 아이의 시선이 담긴 노스탤지어의 선율이, 꿈속을 거닐 듯 자장가에 가까운 개인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가 가득하다. 마치 안젤로 바달라멘티를 떠올리듯 기묘한 서정성의 아름다운 음악들이다. 느리고 단아하지만 멜랑꼴리한 리듬감과 그 속에 언뜻언뜻 자리 잡은 불협화음, 물결치듯 일렁이는 피아노와 오래된 기타의 디튠(복수의 음원을 갖는 악기들의 각 음원 튜닝이 동일하지 않고 음이 약간 틀린 상태), 유령처럼 부유하듯 서늘하게 맴도는 보컬 등 기교들이 결합해 담백하고 소박한 영화에 색다른 초현실적 감성과 희망의 울림을 부여한다.

<미나리>

메인으로 삼은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에밀 모세리가 직접 참여한 보컬 외에 마케도니아에서 원격으로 연주된 40인조 오케스트라와 테레민을 연상케 하는 80년대 코르그 신디의 독특한 음색을 섞어 아칸소주의 고립되고 한적한 시공간 속 소외된 이주민을 묘사하는 포크 사운드는 친밀하면서도 이질적이다. 서로 잘 알면서도 가끔은 먼 것 같은 거리감을 지닌 가족처럼 말이다. 짧고 서늘한 울림 속에 불안과 좌절, 고립과 소외를 담아 생존의 언어로 치환하는 모세리의 총천연색 사운드스케이프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새내기 영화음악가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노련하고 영리하다. 이런 지점에서 <문라이트>의 음악을 맡았던 니콜라스 브리텔이 연상되기도 한다. 모세리는 브리텔처럼 많은 음악상에 후보로 오르며 선전 중이다.


(왼쪽부터) 라나에로스포 '사랑해', 김정미 '햇님'이 담긴 앨범

한국 포크송에 영향을 받은 주제가 ‘레인 송’(Rain Song)

영화에는 에밀 모세리가 만든 노래 두 곡이 삽입됐다. 하나는 ‘레인 송’(Rain Song)이고, 다른 하나는 ‘윈드 송’(Wind Song)이다. 다른 언어로 작업해 본 적이 없는 에밀 모세리를 위해 작업한 가사를 바탕으로 번역가인 스테파니 홍이 한국어로 번역해 영화에 출연한 한예리가 직접 두 곡 다 불렀다. 이 노래들은 카에타노 벨로조와 갈 코스타의 ‘넨휴머 도어’(Nenhuma Dor)나 조 스테퍼드의 ‘노 아더 러브’(No Other Love) 같은 레전드 곡뿐만 아니라 루크 템플 같은 신예 외에 (정이삭 감독이 모세리에게 소개해준)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나 김정미의 “햇님” 같은 70년대 한국 가수들 노래에도 빚을 지고 있다. 미국 히피 문화에서 건너온 통기타 세대 가수들의 노래가 다시 시공간을 초월해 이민자들을 다룬 영화 속 주제가에 영향을 준 연결고리가 퍽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미나리>

감독과 작곡가는 특히 ‘레인 송’(Rain Song)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한인 가족들을 위한 숭고한 희망가가 되길 원했다. 비가 내려 땅에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듯, 그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 내용과 무관하게 “비 노래”라 이름 붙였다. 계절이 바뀌고 땅이 바뀌어도 강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미나리처럼 이 복고 지향적인 포크송은 가장 소중한 기억과 감정을 환기시키고 관객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한다. 그 효과 때문인지 <미나리>의 주제가 ‘레인 송’(Rain Song)은 오스카 주제가상 예비 후보인 쇼트리스트 15편 중 하나에 올랐으며, 아울러 에밀 모세리의 <미나리> 스코어 역시 오스카 음악상 예비 후보 15편 안에 들어가 있다. 최종 후보에 올라 오스카 시상식에서 한예리가 직접 부르는 모습을 슬쩍 기대해본다.

늘 한결같은 밤 속삭이는 마음 어우러지네.

작은 발자국 위로 한 방울씩 또 비가 내리네.

고개를 들고 떠나가는 계절을 배웅하네.

긴 기다림 끝에 따스함 속에 노래를 부르네.

겨울이 가는 사이

봄을 반기는 아이

온 세상과 숨을 쉬네.

함께 맞이하는 새로운 밤의 품.

- 레인 송(Rain Song)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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