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세요? 그래 봤자 드라마잖아요?” 한참 신작 드라마의 실망스러운 부분과 위험해 보이는 부분을 짚어가며 열변을 토하던 내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상대는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한마디 할까 하다가, 그냥 같이 웃었다. 조치훈 9단이 그랬다던가.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고. 자신에게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래도 바둑”이지만, 남들에게는 “그래 봤자 바둑”인 거라고. 내가 아무리 드라마가 끼치는 영향이 크고 중하다고 말하고 다닌다 한들, 누군가에게는 그래 봤자 드라마일 뿐이겠지. 그렇게 허허 웃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버스 창밖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떤 드라마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고.
정말이다. 어떤 드라마는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MBC에서 청소년드라마 <나>(1996~1997)를 방영할 무렵 중학교에 진학했던 나는, <나>에서 묘사된 고등학교 방송반의 일상에 매료되어 중학교 방송반원 모집에 응모했다. 알고 보니 <나>를 보고 방송반 모집에 응모한 사람은 나 하나가 아니었고, 1997년 전국 중고등학교 방송반 신입반원 모집 경쟁률은 어지간한 명문대 응시율만큼 높았다. 물론 직접 경험하는 방송반 생활은 <나>에서 묘사된 것과는 백만 광년 정도의 거리가 있었지만, 그 시절 방송반 체험은 훗날 TV칼럼니스트로 살아가는 내 커리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나마 중고등학교 방송반 활동은 인생에 끼치는 영향이 적은 편이다. SBS <카이스트>(1999~2000)를 보고는 공대에 진학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어디로 뻗어 나갔을까. 모르긴 몰라도 <카이스트> 한 편이 과학입국에 기여한 바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어떤 드라마는 뉴스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걸 전달해준다. 광주민주항쟁이 공식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건 1988년 국회에서 열였던 제5공화국 청문회였지만, 여전히 SBS <모래시계>(1995)를 통해 처음으로 광주민주항쟁에 관해 알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뉴스는 어려워도 이야기의 힘은 세니까. 고향으로 내려간 후배를 만나러 광주로 간 태수(최민수)가 계엄군의 참혹한 폭력을 목격하고는 시민군에 합류하고, 녹화사업으로 강제로 공수부대로 끌려간 우석(박상원)이 계엄군으로 차출되어 광주에 왔다가 대치 중인 시민군들 사이에서 고향 친구 태수를 발견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언제 다시 봐도 가슴 아프다. 그 절절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생애 처음으로 그 해 5월 광주에 고립되어 있었을 그 수많은 시민군들의 심정을 상상하게 된 사람들이 분명 있었으리라.
심지어, 어떤 드라마는 오랜 세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픔을 대신 토로해준다. SBS <모래시계>의 콤비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3년 앞서 선보였던 MBC <여명의 눈동자>(1991~1992)는 10년가량의 세월을 아우르는 작품이다. 1943년 남원에서 시작해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로 끝이 나는 이 작품은, 윤여옥(채시라), 장하림(박상원), 최대치(최재성) 세 명의 주인공을 앞세워 임팔 전투와 남양군도, 만주국 731부대와 조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요원 훈련 등의 역사를 숨가쁘게 훑다가 제주도에서 멈춰 선다. 반세기 가까이 방송에서는 누구도 제대로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제주 4·3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경찰을 피해 육지를 떠나 제주도로 피신한 대치와 여옥은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횡포를 보고는 봉기에 가담하고, 때마침 미 군정청에서 정보장교로 일하던 하림은 4·3의 진상조사와 수습을 위해 제주로 넘어간다. 세 주인공의 안내를 따라, 특히나 뭍에 사는 시청자들이라면 제대로 접해 본 적 없었을 제주 4·3의 비극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도 36회 중 6회차, 전체 드라마의 1/6 동안이나.
송지나 작가는 원작에선 상세히 다루지 않았던 4·3을 다루기 위해 당시 4·3 관련 취재를 집중적으로 했던 제주도 ‘제민일보’사를 찾아가 자료를 구하기도 하고, 그 시절 쉽게 물을 수 없었던 미군정의 책임을 작품 안에서 묻기도 했다. 물론 이 드라마 한 편으로 제주 4·3의 진실이 다 드러나고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다 풀렸을 리 만무하다. 한쪽에는 <여명의 눈동자>의 묘사가 지나치게 좌익 편향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쪽에는 <여명의 눈동자>가 봉기의 정당성을 묘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직도 4·3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지 국민적 합의도 끌어내지 못해 다른 수식어도 없이 덜렁 숫자 ‘4·3’으로만 부르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뭔가. 그래도, 누군가에겐 그 오랜 세월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설움을 대신해서 토로해 준 작품이 <여명의 눈동자>였을 것이다.
“그래 봤자 드라마”라는 말을 했던 그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천천히 시간을 할애해 <여명의 눈동자>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직선제 개헌은 했지만 여전히 독재자의 친구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 아직까지 보안사가 민간인을 사찰하고 안기부가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던 그 시절, 어떤 드라마는 반세기 가까이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4·3을 대신 이야기해줬다고. 드라마는 우리 생각보다 힘이 세고, 우리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도 많다고. 그러니까, 그래 봤자 드라마지만, 그래도 드라마라고.
이승한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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