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황금사자상을 받은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놀라운 에세이 『사건』(2000)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여기서 사건이란 작가의 임신 중단 경험을 일컫는다. 중절 수술의 당사자는 물론이고 의사와 조력자까지 강력하게 처벌되던 1960년대의 프랑스, 원치 않는 임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롭게 분투했던 작가의 내면이 차갑고 선명한 문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영화는 1.37:1의 화면비와 얕은 심도, 인물에 근접한 카메라 워킹을 통해 원작의 형식을 스크린에 옮겨놓는다. 먼발치에서 주인공을 응시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의 입장에서 직접 체험하듯 영화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인물과의 거리를 성큼 좁힌 영화는 임신 중단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논평하고 주장하기보다, “시대나 성별을 초월한 신체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며 ‘사건’을 따라간다.
프랑스 앙굴렘에서 대학을 다니며 문학을 공부하는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 그는 노동자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 문턱을 밟은 가족의 자랑거리이자, 미래의 교수를 꿈꾸는 열의 있는 학생이다. 학내 분위기는 자유롭고 열정적이지만, 공부 잘하던 여학생들이 예기치 않은 임신과 결혼으로 학교를 떠나는 사태는 예사로 일어난다. 그런 그들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안에게도 앞날을 가리는 먹구름이 찾아온다. 졸업 시험을 앞두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계속 공부하고 싶고 계획한 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싶기에 그는 중절을 결심한다. 하지만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 일이 뜻대로 될 리 없다. 엄격한 법적 제재는 물론, 주변인들의 내면화된 규율과 통념 역시 안을 좌절케 한다. 의사는 함께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며 돕기를 거부하고, 기숙사 생활을 함께하는 친구들도 그건 미친 짓이라며 고개를 돌린다. 법의 규제를 피해 혼자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안은 결국 위태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뜨개질바늘, 양잿물,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탐침관 삽입술 등 영화가 묘사하거나 언급하는 당대 임신 중단의 여러 수단은 목숨을 담보로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도 운이 나빠 발각되면 감옥행이다. 영화는 그 모든 것을 각오한 채 가능한 모든 것을 해보려는 안을 숨 막힐 정도로 집요하게 뒤쫓는다. 인물의 불안, 분노, 짜증 같은 감정은 물론이고, 결정적 대목에서 화면을 찢을 듯 생생하게 묘사된 고통까지 가감 없이 담아낸다. 몇몇 적나라한 장면들은 보기 괴로울 정도지만, 그것이 비단 충격 효과만을 불러오는 건 아니다. 원작에서 아니 에르노는 의사에게 끝내 도움을 구하지 못한 일에 대해 말하며, “우리 중 누구도 임신 중절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언어 속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쓴다. 언어가 미처 닿지 못한 곳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몸이 있다. 카메라는 말과 논쟁에 앞서는 몸의 물질성을 화면 가득 드러내리라 결단이라도 한 것처럼 안의 모든 순간을 비춘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그야말로 몸의 싸움이자, 몸을 통한 싸움이다.
<레벤느망>이 묘사하는 광경에는 여성의 욕망과 쾌락의 추구 또한 포함돼있다. 영화 속 젊은 여성들은 밤의 술집은 물론 대낮의 캠퍼스에서도 은근한 성적 긴장을 느낀다. 매력적인 상대로 보이려 노력하고, 욕구 앞에선 솔직해진다. 영화는 외출하기 전 가슴을 부각하고 치마를 짧게 올리는 안과 친구들의 모습을 맨 앞에 배치함으로써, 그 역시 작품의 중요한 주제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들끓는 욕망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너무도 쉽게 수치심과 연결된다. 여학생들은 서로 감시하기에 이르고, 여성의 성 경험은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된다. 안은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욕구에 좀 더 솔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감독에 따르면, “안은 육체적 쾌락에 대한 권리를 위해 조용히 싸운다.” 영화는 안의 욕망에 사랑이라는 변명거리를 덧붙이지 않는다. 그는 그 어떤 알리바이도 없이 남자를 만나 원하는 것을 말한다. 시대의 억압 속에서 임신 중단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자기 몸에 대해 온전히 주도권을 주장하는 문제와 자연스럽게 만난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글 손시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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