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가가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는 샌드링엄 별장은 갖가지 규칙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몸무게를 재야하고, 난방 없이 담요만으로 추위를 피해야 한다. 모든 식사와 행사에는 정해진 의복을 입고 참석해야 하며, 여왕보다 늦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의문은 부드럽게 묵살당한다. 그런 것들을 왜 지켜야 하느냐고 묻는 건 여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건 유구한 전통이고, 전통에는 예외가 없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운 왕세자비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겐 하나의 규칙이 더 적용된다. 절대로 눈에 띄는 별스러운 행동을 하지 말 것. 세기의 아이콘인 그녀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파파라치의 관심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지금 말 그대로 온갖 것들에 짓눌려있어 숨쉬기조차 힘들다. 그간의 피곤한 왕실 생활이 섭식장애와 자해 증세를 불러왔으나, 그마저도 숨겨야만 한다. 지척에 유년 시절을 보낸 옛집이 있지만, 그곳에 가는 것 또한 허락받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이지 간신히 버티고 있다.

<스펜서>는 다이애나가 고통 속에 지냈던 1991년 크리스마스 연휴 단 3일만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스무 살의 나이에 왕세자비가 돼 두 아들을 낳은 뒤, 10년간의 결혼 생활을 겨우 견뎌내고 있던 즈음이다. 왕세자의 공공연한 외도와 세간의 과도한 관심이 긴 세월 다이애나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스펜서>는 꼼꼼하고 광범위한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통상적 전기 영화를 표방하진 않는다. 영화의 첫머리에 삽입된 실제 비극을 기반으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표현은 영화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실제 인물과 사건을 그대로 가져오되, 당시 다이애나의 시간을 비극으로 해석하며 허구를 덧붙인다. 영화는 철저히 다이애나의 입장에서 그해 겨울을 재구성한다. 영화가 재현하는 그녀의 세계에선 종종 망상이 현실을 압도하고, 파괴적 충동은 극에 달해 죽음의 그림자마저 일렁인다. 급기야 간통의 오명을 쓰고 헨리 8세에게 처형당한 앤 불린의 유령까지 출몰한다. 왕족의 일원으로 사는 건 이다지도 어둡고 창백한 일이다.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뒤집어진 동화.

<스펜서>는 여전히 자국과 해외를 부지런히 오가며 작업 중인 칠레의 대표적 감독 파블로 라라인의 신작으로, 할리우드 스타 크리스틴 스튜어트와의 협업이 알려졌을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푸가>(2006)로 데뷔한 이래 라라인은 <포스트 모템>(2010), <>(2012) 등 자국에서 연출한 작품들로 굵직한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입지를 다졌고, 국내 관객들에겐 케네디 대통령 저격 사건 직후의 재클린 케네디를 조명한 <재키>(2016)로 이름을 알렸다. 칠레의 전설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이야기를 담은 <네루다>(2016)에 이어 <스펜서>까지 계속해서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감독은 일련의 작품들을 굳이 전기 영화로 여기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그저 폭발할 것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에 대한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기보다 역사 속에 갇힌 인물의 돌출 순간을 포착하는 게 훨씬 중요한 셈이다.

파블로 라라인의 이러한 영화적 기획에서는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와 그의 세밀한 연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재키>의 나탈리 포트먼은 대중을 위해 매끈하게 가공된 얼굴이 불안과 서늘함으로 물드는 놀라운 순간을 선사한 바 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다이애나는 볼륨을 낮춘 목소리와 움츠린 자세가 특징이다. 뛰놀고 춤추는 걸 좋아했던 소녀는 왕실의 위엄과 세상의 관심 앞에서 일단 자신을 꽁꽁 싸맨다. 하지만 다이애나 스펜서는 끝까지 왕실과 불화했고, 왕세자와 이혼하려는 뜻을 끝내 이뤄내고야 만 의지의 인물이기도 하다. 스튜어트 특유의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는 과도한 표현에 기대지 않고도 다이애나의 송곳 같은 면모를 드러낸다. 너무 참아서 망가져 버린 이 인간은 현기증과 구토, 망상과 강박으로 점철된 사흘간의 고난 끝에 자신을 해하지 않고도 다른 삶으로 향할 수 있는 희망의 실마리를 본다. 샐리 호킨스, 티모시 스폴, 숀 해리스 등 반가운 배우들이 왕실 곳곳을 든든하게 떠받치며 때로 다이애나의 마음을 건드리고, 바로크 음악과 재즈 선율의 기묘한 불협화음이 돋보이는 조니 그린우드(<마스터>, <팬텀 스레드>)의 스코어가 다이애나의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스펜서>로 이미 27개에 달하는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아카데미 시상식의 강력한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점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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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