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작품들이 있다. 어디 가서 대놓고 ‘나 이 작품 좋아해.’라고 말하기 좀 망설여지지만, 내심 마음 속 깊이 사랑해 마지 않는 그런 작품들. 내겐 <록키>(1976)가 그런 작품이다. 어떤 이들은 갸우뚱할 것이다. 아니, <록키>가 어디가 어때서? 하지만 이 시리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무래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록키>의 창조주 실베스터 스텔론은 80년대 내내 레이건의 ‘강한 미국’을 상징하는 머슬맨으로 각광받았다. <록키> 시리즈는 속편을 거듭할수록 팍스 아메리카나와 마초이즘을 전파하는 프로파간다 시리즈로 변질됐다. ‘질 나쁜 흑인’ 클러버 랭(미스터 T)과 ‘고상한 흑인’ 아폴로 크리드(칼 웨더스)를 대립항으로 제시한 <록키3>(1982)는 당시 주류로 올라오기 시작하던 흑인문화를 향한 백인 사회의 공포를 반영한 작품이었다. 성조기를 두른 록키 발보아(실베스터 스텔론)가 철의 장막 너머 사악한 소비에트 연방이 내세운 감정 없는 격투기계 이반 드라고(돌프 룬드그렌)를 상대로 싸우는 <록키4>(1985)는 또 어떤가? 소련의 관중들이 드라고를 때려눕힌 록키의 이름을 연호하는 장면은 비현실적이고, 경기가 끝난 뒤 록키가 마이크를 잡고 하는 일장연설은 지금 다시 봐도 낯뜨겁다.

어디 그 뿐인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1편도 지금 다시 보면 군데군데 거슬리는 장면투성이다. 특히나 록키가 에이드리언(탈리아 샤이어)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 입 맞추는 추수감사절 데이트는, 아무리 봐도 양자 간의 원만한 합의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설정 상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결말이 괜찮았으니 망정이지, 집에 가고 싶다는 에이드리언에게 “나 못 믿어요?”라고 말하며 우격다짐으로 들어오라고 강권하는 모습은 제법 불쾌하다. 덩치가 에이드리언의 네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록키가 에이드리언이 집에 가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는 장면 또한 아찔하다. 바로 직전 아이스링크장에서 펼쳐진 소박하고 순진한 데이트의 감흥이 날아가고도 남을 장면이다. 누군가 이 장면을 문제 삼아 내게 “어떻게 <록키>를 좋아할 수가 있어?”라고 묻는다면, 난 아마 그 지적에 수긍하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끝끝내 내가 <록키>를 놓지 못하는 것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록키>의 본질은 권투를 잘 하는 청년이 멋지게 싸워서 상대를 이긴다는 내용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해서 급기야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 불신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 밑바닥 루저들이, 끝까지 버티고 버텨서 그 자기 불신을 이겨내고 제 목소리를 얻는다는 것이 <록키>의 본질이다.

록키 발보아는 애초에 아폴로 크리드와 붙을 만한 레벨의 선수가 아니었다. 사채업자 해결사 노릇이나 하며 근근이 버티는 뒷골목 무명 복서가 세계 챔피언을 상대로 한 라운드라도 버틸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두 사람의 경기는 그냥 흥미로운 쇼에 불과한 것이었다. 록키는 그런 세상의 시선에 맞선다. 경기 전날 밤, 심란한 마음을 품고 텅빈 경기장을 다녀온 록키는 에이드리언에게 말한다. 자신은 이기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고. 아폴로는 어차피 자신과는 레벨이 다른 선수 아니냐고. 자신은 지더라도 상관 없다고. 머리가 깨져도 좋다고. 그저, 아무도 아폴로 크리드를 상대로 15라운드까지 간 적이 없으니, 자신은 15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두 발로 서 있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다면 자신도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그저 동네 건달 나부랭이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록키는 이기려고 링 위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제 삶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링 위에 올라간 것이다. 자신을 내치고 외면했던 세상에게,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신을 건달 나부랭이라고 손가락질한 이들에게, 그리고 그 말들에 휩쓸려 스스로 불신하고 혐오하게 된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록키는 정말 끝까지 버텨낸다. 비록 경기는 아폴로 크리드의 판정승이지만, 록키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심판의 판정은 듣지도 않았다. 15라운드까지 두 발로 버텨낸 것만으로도 록키는 목표했던 것들을 모두 이룬 셈이니까.

목소리를 얻은 건 록키만이 아니다. 오빠 폴리(버트 영)의 술주정과 정서적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던 에이드리언은, 영화가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누가 말을 걸면 불에 데인 것처럼 놀라는 사람이었다. 두터운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차림으로 펫숍 구석에 서 있던 여자.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자기 목소리를 얻기 시작한다. 옷차림은 더 과감하고 편안해지고, 제 생각과 욕망을 소리 내어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며, 나아가 언제나처럼 자신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려 든 폴리를 향해 큰 소리로 저항하고 잘못을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오빠에게 빚진 게 하나도 없다고. 오빠는 늘 나를 돌보느라 오빠 인생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정작 이날 이때까지 오빠에게 밥을 차려주고 집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던 건 나라고.

그런 의미에서, <록키>는 별볼일 없는 뒷골목 건달 록키 발보아가 자기불신과 세상의 의심을 이겨내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자기 목소리 없이 눈에 안 띄는 구석에 서 있던 에이드리언이 제 목소리를 얻고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던 이들로부터 존중과 지지를 쟁취해내는 이야기이고, 승패와 상관없이 자신을 긍정하며 웃을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는 이야기다. <록키> 시리즈가 2편부터 5편까지 서서히 지리멸렬해졌다가 <록키 발보아>(2006)에서 다시 팬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되찾은 건, 스탤론이 <록키 발보아>에서야 비로소 그 본질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난 이제 누군가 <록키>를 싫어한다고 해도 더는 서운해하지 않는다. 46년 전에 만들어진 <록키>는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이 낡았고, 스스로 성취한 본질로부터 멀어진 프랜차이즈는 뒤로 갈수록 더 촌스러워진다. 외전 시리즈인 <크리드>(2015)와 <크리드2>(2018)를 이해하려면 2편부터 5편까지를 다 봐야 하지만, 차마 <크리드> 시리즈를 보기 위해 <록키> 프랜차이즈 시리즈를 빼놓지 말고 다 보라고 권할 만큼 내 얼굴이 두껍진 못하다. 그래도, 여전히 내게 <록키>는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영화로 남아있다. 치열하게 버텨내는 것으로 쟁취한 자존의 이야기, 거듭남의 서사, 그래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시 떠올리게 되는 주문 같은 영화로.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