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늙긴 늙었구나. 영화 〈헌트〉(2022)의 개봉을 앞두고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유튜브 채널들을 순례 중인 ‘청담부부’ 이정재와 정우성을 보면서, 나는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했다. 저 이들이 스물 여섯의 반짝반짝한 얼굴로 〈태양은 없다〉(1999)에 출연한 걸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의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려고 공들여 사복을 챙겨 입고 어른인 척하려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 이정재와 정우성은 ‘문명특급’에 나가서 영화과 22학번 학생들과 MZ세대 신조어 퀴즈를 하고, ‘미노이의 요리조리’에 나가서 영문도 모른 채 기역니은춤을 따라 춘다. 한국 나이로 쉰, 쉰 하나가 된 이 아재들의 고군분투가 귀여운 게 아니라 애처롭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형들도 요즘 트렌드 따라가는 게 영 쉽지 않은가 봐요. 예전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트렌드가 형들 얼굴에 홀려서 저절로 따라왔었는데 말이죠.
세월의 무상함을 곱씹던 나는, 기억 한 구석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태양은 없다〉를 꺼내 다시 틀어 보았다. 그리고는 새삼 놀랐다. 홍기(이정재)의 은갈치 수트와 도철(정우성)의 하와이안 셔츠, 더 서쳐스의 ‘Love Potion No. 9’ 같은 사운드트랙의 멋에 반해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태양은 없다〉는 이정재와 정우성이 각각 연기한 가장 볼품없고 불행한 남자들의 집합소였다. 펀치 드렁크 증상을 겪고 있는 복서 도철은 〈비트〉(1997)의 민이 그랬듯 별다른 비전이랄 게 없었고, 막대한 빚더미에 올라앉은 흥신소 직원 홍기는 〈오징어 게임〉(2021)의 성기훈이 그렇듯 한 방을 꿈꾸며 경마 도박에 가진 돈을 쏟아붓다가 사채업자들에게 쫓긴다. 내일을 꿈꾸지 못해 제 앞에 서 있는 벽을 향해 막무가내로 돌진하고 마는 민이나, 막대한 빚에 쪼들려서 도저히 재기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성기훈 같은 남자들이 〈태양은 없다〉 안에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이 울적한 영화를 왜 그렇게 좋아했던 걸까? 기껏해야 중3 학생이었던 내가, 강남과 압구정동을 누비는 답 없는 루저 홍기와 도철의 정서를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동시에 〈태양은 없다〉가 〈비트〉만큼 흥행하지 못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영화를 〈비트〉가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염세적인 정서로만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시 보니 의외로 성숙한 구석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비트〉에서 사랑하고 복수하다가 죽음으로써 불꽃처럼 산화한 민과 달리, 홍기와 도철은 비루한 오늘을 딛고 내일을 살기 위해 잠을 청한다. 도철은 앞날이 막연한 삼류 복서지만, 얼굴이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고도 다음 경기를 위해 다시 일어난다. 홍기는 주체할 수 없는 빚더미와 밀려드는 자기혐오에 질려서 툭하면 자살기도를 하지만, 그렇다고 끝끝내 죽어버릴 만큼 모진 사람이 아니다. 그는 빌딩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술을 먹다가도, 친구 도철의 경기를 보고 위로해 줄 심산으로 죽지 않고 빌딩을 내려온다. 심지어 〈태양은 없다〉의 엔딩은, 갈 곳이 없어 미미(한고은)의 집 앞에서 노숙을 하다가 일어난 도철과 홍기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비트〉의 비장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태양은 없다〉의 결말은 다소 초라한 것이었으리라. 죽어서 별이 되어버리는 대신, 살아서 지리멸렬해진 동네 건달들의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런 게 삶 아닌가? 김성수 감독은 불꽃 같이 살다가 죽어버리는 〈비트〉의 비장미가 있던 자리에, 구질구질함을 견디면서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청춘의 초라함을 대신 채워 넣었다. 민처럼 죽어버리면 차라리 쉽겠으나, 홍기와 도철은 죽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살아서 그 후폭풍을 책임진다. 그래서일까, 〈태양은 없다〉에는 주인공들이 구깃구깃 구겨진 장면들이 툭하면 등장한다. 물론 구겨져봐야 정우성이고, 구겨져봐야 이정재지만. 홍기가 사채업자 일당에게 잡혀서 오열을 하며 꼭 다음 달까지 갚겠다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 도철이 가방끈도 짧고 돈도 없는 탓에 파티장에서 계속 불청객 취급을 받는 장면은 이제 보면 참 애틋하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초라한 청춘들이 괜히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객기를 부리다가 자기 팔자를 야금야금 망치는 그 어리석은 순간들이, 그리고는 그 바보짓을 책임지기 위해 더 구질구질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내일이 어떤 건지 알기 때문이다.
아마 시대가 그런 성숙함을 필요로 했으리라. 〈비트〉가 개봉한 1997년과 〈태양은 없다〉가 개봉한 1999년 사이,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고 미래를 잃은 이들이 매일매일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개중엔 진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와중에도 달러를 굴려 큰 돈을 만진 사람들, 싼 값에 건물을 사서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고, 본격적으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홍기가 영화 내내 높은 빌딩을 사서 6년 안에 부자가 되겠다는 허튼 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그렇게 국가적 위기를 개인의 기회로 만들어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학업을 포기하고, 집을 팔고, 가족이 붕괴되고, 꿈이 산산조각나는 경험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 그 가득한 구질구질함을 견디자는 이야기, 비록 오늘이 참을 수 없이 초라해도 어떻게든 내일을 맞이하자는 이야기가, 그때의 우리에겐 필요했었다. 홍기랑 도철처럼 답 없는 애들도 사는데, 모든 꿈이 망가져 집도 절도 없는 자리에서도 죽지 않고 사는데,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생각하니, MZ세대 신조어를 몰라서 헤매고, 젊은 애들이 추는 춤을 영문도 모르고 따라 추고, 노안이 와서 잔 글씨는 못 보게 된 두 사람이 더는 애처롭지 않다. 물론 내겐 언제까지나 청춘일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더는 젊지 않다는 건 여전히 좀 낯선 일이지만,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구비구비 가득한 시행착오와 실패들을, 꿈의 좌절과 현실과의 타협을 온전히 견뎌가며 무사히 나이 먹었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 화면 안의 두 사람도, 그들을 지켜보던 나도. 〈태양은 없다〉 속 홍기와 도철이 끝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새로 떠오르는 태양을 봤던 것처럼 말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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